지난 9일 한 역사(力士)가 이 세상을 떴다. 그의 죽음은 뒤늦게 외부에 알려져 12일 언론에 보도됐다. 그의 이름은 이민우였다. 42살의 젊은 나이로 숨진 그는 ‘1980년대 아시아 최고의 역사’에서 씨름꾼으로 변신, 비인기 종목의 설움과 가난을 한꺼번에 풀려고 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스러진 ‘장사의 꿈’ 이면에는 독재자와의 악연이 숨겨져 있다. 바벨에 자신의 삶을 걸었던 이민우가 샅바를 매게된 것은 순전히 가난 탓이었다. 역도만으로는 미래를 보장받기 어려웠던 시절이었고, 대신 한창 인기를 끌고 있던 프로씨름꾼이 된다면 가난을 떨쳐버릴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명예만을 붙좇기엔 당시 한 역도 선수의 생활은 너무 절박했다. 1987년 3월11일, 한국역도의 간판 스타였던 이민우는 전격적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민속씨름선수로 새 출발하겠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선수단 기수이자 역도 무제한급(110㎏ 이상)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이민우로선 1년반 앞으로 다가온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은 커녕 동메달을 따는 것조차 사실상 불가능했다. 당시 세계기록과 이민우의 최고기록은 무려 60㎏이나 차이가 났다. 양친이 사망, 형제끼리 어렵게 살아온 이민우는 마침 씨름단을 창단하려던 삼익가구와 비밀리에 접촉, 계약키로 결정했다. 그러는 사이 이민우는 역도 지도자에게 은퇴 의사를 수 차례 밝혔으나 완강한 반대에 부닥쳐 1987년 3월10일 강화훈련 중이었던 태를선수촌에서 무단 이탈, 잠적해버렸다. 그 행동이 당시 최고 권력자의 진노를 사게될 줄은 미처 몰랐다.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유치한 제 5공화국의 대통령 전두환 씨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스포츠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지나친 관심 때문에 23살 한창 나이의 이민우가 지울 수 없는 아픔을 안고 한 동안 좌절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파동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그 해 3월13일 대한역도연맹은 이민우에게 영구제명의 중징계를 내렸다. 당시 130㎏의 몸무게였던 이민우는 병역특혜마저 취소돼 방위병 소집영장이 발부됐다. 그 나흘 뒤인 3월17일에는 대한씨름협회장이며 이민우를 스카우트한 삼익가구 김동수 회장이 물의를 빚은데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물론 이민우의 삼익가구 입단 계약도 백지화됐다. 삼익가구는 세무사찰을 받아 쑥대밭이 됐다. 왜 유독 이민우의 은퇴와 씨름 전향을 놓고 파문이 일었던 것일까. 이민우가 은퇴를 발표한 다음 날인 3월12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제주도 시찰 중이었다. 귀경길에 전용기 안에서 이민우의 은퇴를 보도한 석간 신문을 본 전 씨는 ‘괘씸한 놈’이라며 크게 화를 냈다고 뒷날 청와대 관계자가 밝혔다. 결국 이민우 파동은 권력 최고위층의 진노에 사색이 된 당시 청와대 관계자들이 이민우에게 괘씸죄를 적용, 아마 선수의 프로 이탈을 막기 위한 희생양으로 삼은 데서 비롯됐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그 파동 이후 동정여론에 몰린 역도연맹은 9월1일 이민우의 영구제명을 철회했고 6개월 남짓 겉돌던 이민우는 9월22일 삼익가구씨름단과 입단계약을 다시 체결, 샅바를 잡는데는 성공했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던 이민우의 씨름인생은 그리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1994년 제 32회 천하장사대회 4위에 오른 것을 최고 성적으로 남긴 채 그는 시나브로 잊혀져 갔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1995년 3월23일 밤 전치 12주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선수생명을 단축시킨 그 사고로 인해 그는 모래판에 제대로 서보지도 못했고 급기야 그해 10월10일 소속팀 세경진흥에 의해 방출당하는 설움도 맛봤다. 제 뜻을 널리 펴보지도 못한 채 한 때 아시아 최고의 역사로 각광을 받았던 이민우는 한많은 이 세상을 등졌다. chuam@ose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