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표의 휘뚜루 마뚜루]등번호가 뭐길래② MLB 역사를 뒤바꾼‘88’번 심판의 세기적인 오심
OSEN 기자
발행 2006.12.11 10: 15

심판도 등번호가 있다. 프로야구 선수나 감독, 코치 뿐만 아니라 심판도 고유의 번호가 있다. 팔 소매에 번호가 새겨져 있으므로 등번호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어쨋든 심판한테도 엄연히 번호가 있다. 2005년 10월 13일(이하 한국시간), 메이저리그의 아메리칸리그 우승 결정전에서 역사를 뒤흔든 ‘세기적인 오심’ 사건이 일어났다. 오심을 저지른 심판은 ‘88번’을 붙이고 있었다. ‘21세기 최악의 오심 후보’로도 거론됐던 그 경기의 오심 경위는 이렇다. 88번 심판이 저지른 21세기 최악의 오심 후보. 아메리칸리그(AL) 챔피언십시리즈에서 1차전을 패했던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홈구장 U.S. 셀룰러 필드에서 열린 LA 에인절스와의 2차전에서 9회말 2사 2루에서 터진 조 크리디의 끝내기 2루타에 힘입어 2-1로 승리, 1승1패로 균형을 맞췃으나 오심논란이 불거졌다. 단기 시리즈에서 잘못된 판정 하나가 승부의 향방을 좌우한 사례는 흔하다. 이 시리즈가 바로 전형적인 본보기였다. 사단은 이 경기 9회 2사 후에 벌어졌다. 2사 주자없는 상황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A.J. 피어진스키가 풀카운트에서 에인절스 캘빔 에스코바르의 6구째 가운데 낮은 포크볼에 헛손질, 삼진을 당했다. 에인절스 포수 조시 폴은 땅에 닿을락 말락한 볼을 잡아냈다. ‘자, 이제 연장전(extra-inning)’이라고 생각한 포수는 공수교대를 위해 볼을 투수 마운드쪽으로 굴리고 덧아웃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 장면이 에인절스가 두고두고 땅을 칠 순간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타자인 피어진스키는 ‘스트라이크 아웃 낫아웃 상태(strike three run to first base)’로 보고, 태그하는 폴의 글러브를 살짝 피한 뒤 포수가 공을 그라운드에 던지자 1루 베이스로 냅다 달려나갔다. 피어진스키는 경기 후 “원바운드라고 생각했고, 구심의 삼진 콜도 듣지 못했다”고 태연하게 설명했다. 구심 덕 에딩스는 원바운드로 간주, 태그가 안됐다는 이유로 스트라이크 아웃 낫아웃으로 판정했다. 문제는 구심이 스윙과 삼진을 표시하는 동작-오른손을 들고 오른쪽으로 크게 흔든(스윙의 제스쳐) 다음, 그 손을 높이 치켜들고 주먹을 쥐는(삼진의 제스처)-을 한 것이다. TV 재생화면은 포수가 직접 공을 잡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마이크 소시아 에인절스 감독이 덕아웃에서 즉시 뛰쳐나와 구심이 취한 일련의 동작을 근거로 맹렬히 항의했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에딩스 구심은 통상 포수가 (노바운드로) 직접 공을 잡을 경우 ‘노 캐취!(No catch!)’라고 큰소리로 외치는데 그러지 않았으며, 타자에 대해서도 ‘아웃’이라고 외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자신의 판정이 옳았음을 강변했다. 항의가 계속되자 구심은 타자가 좌타석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각도에서 공을 잡는 순간을 잘 볼 수 있었던 3루심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3루심은 구심의 판정에 동조했다. 에인절스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됐다. 아지 기옌 화이트삭스 감독은 파블로 오수나를 대주자로 내세웠고 2루 도루 성공으로 득점 찬스를 잡았다. 그리고 볼카운트 2-0에서 화이트삭스 8번타자 조 크리디는 좌익 선상 2루타를 날려 승부를 끝냈다. 화이트삭스 선발 마크 벌리는 9이닝을 1실점으로 완투하고 9회말 팀이 끝내기 점수를 뽑아내 승리 투수가 됐다. 경기 직후 소시아 감독은 인터뷰에서 “심판들이 스트라이크 낫아웃으로 판정했다”면서 결과에 승복했지만 “공은 땅에 닿지 않았다. A.J. 피어진스키는 아웃이었다”고 딱 잘라 말했다. TV의 화면상으론 공은 땅에 닿지 않은 걸로 나타났다. 결국 삼진 당하고도 살아나간 주자가 끝내기 결승점(대주자로 바뀌었지만)을 올린 꼴이 됐다. TV 해설자는 “화이트삭스는 심판에게서 승리의 선물을 받았다”고 꼬집었다. 88번 심판의 도움으로 1917년 이래 88년 만에 우승한 행운의 화이트삭스. 오심 덕분에 연패를 모면한 화이트삭스는 그 뒤 적지 애너하임에서 3연승, 4승1패로 아메리칸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화이트삭스는 여세를 휘몰아 월드시리즈에서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4승무패로 완파, 1917년 이후 88년 만에 최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승리의 여신’의 희롱이었을까. 공교롭게도 리그챔피언십 2차전의 구심 덕 애딩스의 번호가 바로 ‘88번’이었다. 1917년은 미국이 제 1차 세계전쟁에 참전한 해였다. chuam@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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