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정말 현실화 됐습니다. 박태환(18. 경기고)과 김연아(17. 군포 수리고)를F 보면 그렇습니다.
“한국인이나 동양인은 수영이나 피겨스케이팅에서 메달을 따기는 불가능할 거야.” 1970~80년대 올림픽과 국제대회를 취재하면서 수영과 피겨는 서양인들의 잔치로 끝나는 종목으로 치부했습니다.
우리 선수들이 수영에서 올림픽에 참가한 것은 지난 1960년 로마 올림픽부터였습니다. 그때 한국 대표로 나섰던 어느 다이빙 선수는 10m 높이 플랫폼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무섭다고 벌벌 긴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한국은 올림픽에서 한 번도 수영 각 종목에서 8명이 겨루는 결선에도 나간 적이 없습니다. 한규철이 1998년 세계선수권대회 남자 접영 200m에서 7위에 오른 게 최고 성적이었습니다.
은반의 요정들이 펼치는 피겨 역시 하위권에서 맴돌았습니다. 1968년 프랑스 그레노블에서 거행된 동계 올림픽부터 우리가 출전했는데 매번 10위권에 그쳤습니다.
올림픽 현장을 몇 차례 취재하면서 수영장과 스케이트장을 가보면 항상 초만원을 이루고 열기가 뜨거운데 저만 홀로 썰렁한 기분으로 외톨이가 됐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못오를 나무’로만 알았던 이 종목에서 혜성같이 김연아와 박태환이 등장했습니다. 김연아는 지난해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참가하는 시니어 그랑프리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박태환은 3월 25일 멜버른 세계선수권대회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본인의 주종목도 아닌데 결선 진출 정도가 아니라 기막힌 역전극을 펼치며 정상을 차지해 세계 수영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40여 년 전부터 고대하던 수영과 피겨에서 세계적 선수가 이제야 눈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한국인이 도전하기 어려운 부문은 수영, 피겨만이 아니라 야구에서 메이저리그 진출도 마찬가지입니다.
메이저리그 일보 직전까지 간 선수로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로는 박철순(51)이 있습니다. 연세대-공군을 거쳐 대표팀 선수였던 박철순은 1980년 1월 밀워키 브루어스 마이너리그팀에 계약금 1만 달러에 월봉 700 달러를 받기로 하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더블 A팀에서 트리플 A로 승격할 무렵인 1981년 말에 국내 프로야구가 출범한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 OB 베어스에서 22연승과 첫 해 우승의 신화를 탄생 시켰습니다.
실제로는 그 이전에 MBC 청룡에서 프로 초창기 잠깐 뛴 이원국(59)과 OB 감독을 역임한 이재우(62)가 박철순보다 먼저 메이저리그 문을 노크했습니다.
이원국은 중앙고 2학년 때 불 같은 강속구로 팀을 전국대회에서 우승시키고 졸업 직전에 도쿄 오리온스에 입단해 백인천에 이어 두 번째로 일본 프로에 진출했는데 2년 후에 미국으로 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40인 로스터에 오르기도 했으나 결국은 트리플 A팀에서 3년간 마이너 생활을 했습니다.
이재우는 제일은행에서 최고의 타자로 활약하다가 1973년에 미국으로 가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트리플 A팀에 발탁이 됐으나 몇 달 뛰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박철순 이후로 1970년대와 80년대에 메이저리그에 갈 만한 실력을 지녔던 투수로는 이선희(52. 전 삼성 코치), 최동원(49. 한화 2군 감독), 선동렬(44. 삼성 감독) 등을 꼽을 만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병역 문제로, 병역 혜택을 받아도 국내 프로에서 뛸 경우에만 적용돼 해외 진출이 좌절됐습니다.
최동원은 1981년 8월 미국에서 열린 대륙간컵 대회에서 무쇠팔을 과시하며 최우수선수상을 받자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4년간 연봉 61만 달러에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계약 내용이 불리해 실랑이가 벌어졌고 다음 해 우리나라에도 프로가 출범하자 미국행을 접었습니다.
선동렬은 고려대 졸업반 시절인 1984년에 LA 다저스가 연봉 50만 달러를 제시했습니다. 군 입대를 면제 받으려고 신체검사 때 전날 폭음을 해 지병인 치질을 도지게 한 다음 검사를 받았는데 군의관이 “일반인 같으면 면제 처리하겠으나 유명인이므로 회의를 해봐야 한다”며 시간을 끌다가 결국 현역 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해태 구단에서 미국행을 막기 위해 군의관에게 손을 쓰는 바람에 좌절됐다고 합니다.
메이저행 0 순위로 꼽히면서도 국내에서만 던지던 선동렬은 1996년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로 옮기고 ‘나고야의 태양’으로 명성을 과시한 다음 1999년 미국행을 다시 추진합니다. 그러나 메이저 구단 제시액이 생각보다 적은 데다 중간에서 주선한 에이전트가 장난질을 하는 것을 보고 미국행을 단념했습니다.
메이저리그행이 요원하게 보였던 1994년 초 한양대 2학년생인 박찬호가 전격적으로 LA 다저스에 입단해 야구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박찬호는 당시 조성민, 임선동 등과 주목되는 신예로 한양대의 파격적인 주선에 힘입어 동기생을 앞질러 미국행을 성사시킨 것입니다.
계약금 120만 달러에 연봉 10만 9000달러로 상당한 대우를 받은 박찬호는 1996년부터 빅리거로 등장했으며 2002년에는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간 650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 계약을 맺어 한국 야구계의 선망의 대상이 됐습니다.
40년간 기대하던 야구계의 꿈을 이룬 박찬호(34)의 성공을 보면서 국내 유망주 30여 명이 태평양을 건너갔습니다.
그 중에 투수로는 1997년에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한 김선우(30)와 1998년에 뉴욕 메츠에 들어간 서재응(30), 1999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로 간 김병현(28) 등이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박찬호 이후에 4년 가량 지나 이들이 메이저 구단 문을 노크해 국내 투수들의 희망을 이어갔는데 서재응이나 김병현 이후 8년이 지난 현재는 메이저리그에 오를만한 국내 투수가 나타나지 않아 아쉽습니다. 최동원-선동렬-박찬호-서재응, 김병현으로 이어지는 발군의 투수들 나이와 시기를 살펴보면 4~10살 간격을 보입니다.
확률게임으로 따져보면 박찬호 대를 이을 최고의 투수가 탄생할 때가 다가왔습니다. 그 후보로는 지난 해 6월 LA 에인절스에 입단한 진흥고 출신 ‘괴물 투수’정영일(19)이 있습니다. 그러나 확률게임이라는 게 가능성만 열어두는 것이기 때문에 2년내로 정영일이 각광을 받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박찬호는 마이너리그로 내려가고, 김병현이 중간투수로 처진 것을 보고 서운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천일평 OSEN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