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의 대를 이을만한 투수가 나타나지 않아 서운한 것처럼 타자 부문에서도 메이저리그나 일본에서 이승엽과 같이 명성을 날릴 선수를 찾기 힘들어 아쉽습니다. 먼저 해외 진출이 어려웠던 시절에 해외에서 성공 가능성이 컸던 대형타자를 알아보겠습니다. 해외 진출 1호는 1962년 2월 일본 도에이 구단에 입단한 백인천(64)입니다. 경동고-농협에서 뛰며 대표팀 포수로 활약하던 백인천은 대한체육회 이주일 회장과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가 다음 해부터 1군에 올라 19년간 대활약을 하며 수위타자 타이틀까지 차지합니다. 당시 미창팀에서 1루수, 거포로 활약하던 김응룡(현재 삼성 사장)도 일본 프로에 갈 길이 생겼으나 ‘일본행을 앞장 서 주선해줄만한 유력 인사가 없어’ 좌절됐다고 합니다. 그 다음 후보로는 이재우(62. 전OB 감독)가 덩치는 크지 않았으나 뛰어난 타격 솜씨를 자랑해 꼽을만 합니다. 제일은행팀에서 실업야구 최초 2연타석 홈런, 1이닝 3안타 등의 맹타를 과시한 이재우는 1964년 도쿄 올림픽에 한국 여자 배구팀 주전 선수로 출전한 유춘자 씨와 71년 초에 ‘대체방’(제일은행 내 커플을 일컫는 속어)을 하고 72년에 미국에 이민 가 먼저 오클랜드 어슬레틱스팀에 들러 혼자 힘으로 입단 테스트를 받았습니다. “내 실력 정도라면 바로 빅리거가 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마이너리그로 가라고 하더군요. 그나마도 최고급인 트리플 A에서 몇 달 뛰다가 메이저리그에서 받아 주지 않은데 불만을 품고 그만 두었죠.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얼마나 내가 메이저리그를 몰랐던가, 웃음이 나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김재박(53)과 김일권(51)이 있습니다. 대광고-영남대-한국화장품에서 선수 생활을 한 김재박은 실업야구 신인 때 타율과 홈런, 타점, 도루 등 7관왕을 차지한 야구 천재입니다. 군산상고-한양대-상업은행을 거친 김일권은 요즘으로 치면 추신수와 비슷한 선수였습니다. 잘 때리고, 빠르고, 센스있는 3박자를 갖춘 파이터입니다.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대회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세계 정상에 오를 때 김응룡 감독은 체격이 크지 않은 김일권을 4번타자로 기용할 정도로 파워있는 방망이도 구사했습니다. 두 사람이 만일 20년쯤 뒤에 태어났다면 메이저리그에서 1, 2번 타자로 활약하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김재박과 김일권을 이을 야구 천재로 이종범(37)을 꼽습니다. 광주일고-건국대를 거쳐 1993년 해태에 입단한 이종범은 98년에 주니치 드래건스로 옮겨 기대를 모았습니다만 일본에서 좋은 성적을 남기지 못하고 3년만에 고향팀으로 복귀했습니다. 투수보다 타자가 더 적응하기 힘든 곳이 해외인 모양입니다. 박찬호가 1994년에 메이저리그에 간 다음 국내 선수는 30여 명이 미국에 진출했는데 대부분은 투수입니다. 타자로는 최희섭(28)이 최초로 2002년에 최초로 시카고 컵스에 입단했습니다. 현지인들보다 덩치가 더 큰 최희섭은 초기에 이달의 신인으로 선정되는 등 비상한 관심을 모았으나 체격만큼 파워를 보여주지 못해 지난 해부터 마이너리그로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더욱 주목을 받는 선수가 추신수(25)입니다. 부산고 시절에 투수였던 추신수는 2000년에 시애틀 매리너스에 입단하여 주로 마이너리그에서 뛰다가 지난 해 7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옮기면서 각광을 받습니다. 이적하자마자 끝내기 홈런에 동점홈런과 결승타 등을 때려 빅리거가 될 가능성을 높였습니다. 하지만 좌완투수에게 약하고 몸값 높은 선수를 그와 경쟁 시키면서 안정적인 플레이가 힘들어 올해는 또한번 시련의 한해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삼성에서 한 시즌 56개의 홈런을 터뜨려 ‘국민타자’ 칭호를 받는 이승엽(31)은 2004년 일본 지바 롯데마린스로 이적해 첫 해는 고생했지만 다음 해부터 저력을 과시하고 지난 해는 명문구단 요미우리로 옮겨 4번타자 자리를 확실히 과시하고 있습니다. 백인천보다 더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승엽과 같은 최고타자가 출현할 확률은 40년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확률게임으로는 그렇지만 40년이 아닌 수년내도 가능한 게 확률게임의 재미입니다. 이대호(롯데)와 김태균(한화)에게도 기회는 있습니다. 천일평 OSEN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