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이글스의 김승연(55) 구단주의 아들을 위한 보복 폭행 사건을 지켜보면서 결국 터질만한 사건이 터졌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20여년간 스포츠계에서 벌인 각가지 돌출행동과 일반인은 상상하기 어려운 조치를 취해왔기에 그렇습니다.
김 회장은 한화 그룹이 이번 사건을 조금이나마 총수를 변호하려고 배포한 지난 4월 29일 홍보자료 ‘김 회장의 인간적인 면모’ 내용처럼 아들에 대한 사랑이 깊고 부모를 위한 효심이 깊으며 탁월한 경영 능력이 있는 사람일지는 몰라도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불 같은 성격 때문에 극단적인 면도 있다고 주위에서 평가해 왔습니다.
김승연 회장은 경기고 시절 복싱을 익혔고 이를 인연으로 1982년 대한아마튜어복싱연맹 회장으로 처음 취임하며 발을 내디뎠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직후 2년간 공백을 빼고 1996년까지 10년이상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화끈한 지원으로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어 복싱인들로부터는 상당한 호응을 받았고 지금도 아마복싱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때는 복싱에서 전체급 금메달이란 놀라운 성과를 거두어 우리가 종합 2위를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88 서울 올림픽 때는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거두어 우리가 종합 4위를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몫을 하기도 했는데 지나친 텃세 판정으로 금메달을 따냈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금메달을 획득한 한 선수는 도리어 뻗어나가지 못하고 링에서 사라졌습니다.
지난 86년 빙그레 이글스 구단주로 야구계에 등장했던 김 회장은 프로야구판에서 다정다감한 모습을 보여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빙그레 창단 감독인 배성서 감독과 2대째 감독인 김영덕 감독 두 지도자 모두 ‘종신 감독’이란 말 때문에 도중하차 했습니다.
배성서 감독은 “김 회장이 그룹 사장단 회의 때 나를 옆 자리에 앉히며 극진히 대우해 주고 평생 감독을 하라고 한다”며 김 회장의 지극한 사랑을 과시했으나 첫 해 최하위, 2년째에 7개팀 중 6위를 차지하자 사령탑에서 물러났습니다. 그가 물러나면서 “이제 성적이 나기 시작할 때인데 언제는 종신 감독이라고 부추기더니…”라며 섭섭해 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바통을 이어 받은 김영덕 감독은 다음 해 한국시리즈에 오르는 등 4차례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상당히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1993년에 “회장이 종신 감독으로 여긴다”는 말이 퍼지면서 역시 팀을 떠났습니다. ‘종신 감독’이란 말이 신문에 보도되자 이상하게도 선수들이 무기력증에 빠지고 성적이 곤두박질을 치자 그 해 말에 사직해야 했습니다.
두 지도자 모두 ‘영원한 이글스 감독’이란 각별한 구단주의 대우에 부풀었으나 구단 사장 등 구단 실무진에서 팀 성적과 현장 분위기를 내세우는 바람에 떠나게 됐고 ‘종신 감독’을 약속한 구단주는 마지막 순간에는 나몰라라 한 것입니다.
빙그레 이글스가 1989년, 1991년, 1992년에도 한국시리즈에 올라갔으나 잇따라 준우승에 머물고 1993년에는 5위에 처지자 김 회장은 재산 싸움을 벌이던 동생 회사 이름인 빙그레라는 이름을 지우고 1994년부터는 한화 이글스라는 명칭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무렵 김 회장은 미국 LA에 실베스타 스탤론이 살았던 고급 저택을 거액의 외화를 들여 구입해 불법 외화 거래 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김영덕 감독에 이어 이글스는 1994년에 롯데와 재계약을 약속한 강병철 감독을 무리하게, 전격적으로 영입해 야구계의 질서를 깨뜨렸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통 큰 회장님’이란 이야기는 1996년에 한화 이글스 선수단에 파격적인 보너스를 내놓으면서 세간에 더욱 회자됐습니다. 한국시리즈에 오르지 못하자 구단 사장 등이 경질됐으나 96시즌 들어서도 초반부터 연패를 거듭해 구단 관계자들은 안절부절했습니다.
최하위를 달리고 있어 구단 사장이나 감독이 어떤 불똥이 떨어질까 걱정하던 4월 말께에 김 회장은 구단 사장을 불러 봉투를 전달했습니다. 안에는 상여금 3억 원이 들어있었습니다. 이를 전달 받은 강병철 감독이나 선수들은 그 후 분발, 한때는 2위까지 올랐다가 결국 준플레이프에 진출했습니다.
야구계에서는 시즌 도중 최하위팀에 처음으로 주어진 거액 보너스에 대해 “그 당시 장인인 서정화 씨(전 내무부장관)가 용산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돼 회장의 기분이 좋았기에 베풀어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야구인은 “총선 때 장종훈 등 선수들에게 지원 유세를 나가라고 했다가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제동을 걸어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당선돼 김 회장의 기분이 좋았고 성적이 나쁜 팀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한 김승연 회장의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 깜짝 선심”이라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1999년 정규리그 승률 4위팀으로 기적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한화 이글스는 2003년 7월 17일에 홈구장인 대전에서 올스타전을 갖습니다. 그런데 그 날 김승연 회장의 돌출행동이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경기 직전 노무현 대통령이 본부석에 앉자 왼쪽 자리에는 으레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이 배석하는 게 의전상 관례인데 김승연 회장이 나타나 자리를 차지해 조금 후 나타난 이 장관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김승연 회장은 회사 비서에게 야구공을 3개 달라고 해 노무현 대통령에게 공에 사인을 해달라고 요구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대통령의 올스타전 사인볼이야 한국야구위원회 총재(당시 박용오 총재)가 적절한 시기에 요청하는 관례인데 갑자기 김 회장이 직접 나선 게 이상했던 것입니다.
어색하게 사인을 해준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공을 건네받은 김 회장은 이번에는 그 공을 떨어져 있는 회사 비서에게 전달한다고 바닥에 굴려 보내는 해프닝까지 벌였습니다. 대통령 경호원들은 나중에 김 회장측에 경고를 주었고 경기고 선배인 박용오 총재도 후배를 나무랐다고 합니다.
주변에서는 이날 김 회장의 돌출행동이 그 전 해 한화 그룹이 대한생명을 어렵게 인수해 기분이 좋아 빚어진 것이라는 풀이도 하고 어느 사람은 김 회장이 낮 술을 마셔 실수를 했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김승연 회장은 그 때 돌출행동 4개월 후 대선자금 비리 혐의로 사직 당국에 걸렸으나 2004년 1월 도피성 장기 출국을 했습니다.
한화 그룹 비서실에서 작성한 ‘김 회장의 인간적인 면모’에는 김승연 회장과 김인식 이글스 감독을 묶는 고리는 신뢰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2005 시즌 프로야구 개막을 앞두고 김인식 감독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으나 사령탑을 교체하지 않았으며 신의에 어긋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아 야구 관계자들이 감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김인식 감독도 2006년 봄 WBC대회 4강 기념 초청 리셉션에서 김 회장을 만나 “병으로 한때 불편한 몸을 가진 본인을 이글스 사령탑으로 믿고 기용해준 김 회장이야말로 재활용 전문 경영인답습니다”고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지난 1997년 시즌 도중 백인천 감독이 뇌출혈 증세를 보이자 시즌 후 삼성 구단은 백 감독을 사퇴시킨 사례가 있어 대비가 되지만 비교적 경미한 증세를 보인 김인식 감독에게 구단주의 선행이라고 굳이 표현한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제 생각에도 김승연 회장은 배포 큰 경영인이고 스포츠계에서는 ‘통 큰’ 경영인이라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구단주는 구단주로서 지켜야 할 본분이 있어야 하고 구단주다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돈의 힘을 빌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아들을 때린 사람들을 산으로 끌고가 막가파식으로 폭행하는 모습은 스포츠 팬이나 스포츠를 좋아하는 어린이들에게 절대 보여주어서는 안될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천일평 OSEN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