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홈런은 야구의 꽃으로 부른다. 홈런 한 방으로 경기의 흐름을 단숨에 뒤집을 수 있는 ‘반전의 묘미’가 유별난 스포츠가 바로 야구다. 홈런타자들이 팬의 굄을 아낌없이 받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런 홈런이 사라졌다. 고교야구 무대에서 홈런을 구경하기 어렵다. 동대문구장에서 열리고 있는 제 37회 봉황기고교야구대회에서는 36게임을 소화한 8월 16일 현재 홈런이 겨우 5개가 나왔을 뿐이다. 지독한 홈런가뭄이다. 이쯤 되면 ‘홈런 실종’ 신고라도 해야 할 판이다.
비슷한 시기에 열리고 있는 이웃나라 일본의 여름철 고시엔대회(8월 16일 현재 32게임, 16홈런)와 비교해봐도 그 초라함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물론 지역 예선에 4081개교가 참가한 고시엔대회와 55개팀이 출전한 봉황기대회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프로야구도 역시 마찬가지다. 홈런 총갯수는 작년에 비해 늘어났지만(2006년 587개, 경기당 1.16개꼴-2007년 541개 경기당 1.38개꼴) 이른바 거포부재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8월 16일 현재 심정수(삼성 라이온즈)가 24개로 홈런더비 1위에 올라 있고 브룸바(23개. 현대 유니콘스), 이대호(22개. 롯데 자이언츠), 양준혁(20개. 삼성) 이 그 뒤를 좇고 있는 형국이지만 작년(이대호, 26개)에 이어 올해도 30개 미만 홈런왕이 나오는 것이 아니냐는 한탄의 소리가 절로 나올 법하다.
프로의 젖줄인 고교야구 무대에서 홈런이 사라진 까닭은 무엇일까. 대한야구협회 이상현 사무국장은 홈런 감소 현상과 관련, “나무 배트 사용과 전반적인 타격기량의 저하, 투수선호 현상”등 3가지를 꼽았다.
우선 과거 알미늄배트에서 나무배트로 전환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대한야구협회는 2004년 봉황기대회 때부터 알미늄배트를 나무배트로 바꾸어 사용토록했다. 국제야구연맹(IBAF)이 2004년부터 나무배트 사용을 의무화하도록 룰을 개정했고, 그에 발맞추어 아시아야구연맹(BAF)도 규정을 바꾸었다. 대한야구협회는 그에 따라 2004년 전반기 적응기간을 거쳐 후반기 대회(봉황기)부터 나무배트를 사용케 했다.
그 결과 그 해 봉황기대회는 2003년(59개)에 비해 홈런수가 ⅓(19개)로 부쩍 줄어들었다. 대한야구협회가 집계한 2000년대 이후 고교야구대회 홈런 통계를 보면 2000년 247개→ 2001년 336개→ 2002년 428개→ 2003년 314개→ 2004년 265개였던 것이 나무배트를 전면 시행한 2005년 들어 50개로 뚝 떨어졌고 작년에는 98개로 약간 늘었다가 올해 다시 37개로 미끄럼탔다.
올해 대통령배를 비롯 전국규모의 고교야구대회 가운데 청룡기와 무등기에서는 홈런이 한 개밖에 없었다. 그나마 청룡기 홈런은 그라운드(인사이드파크) 홈런이었다.
홈런이 줄어드는 원인으로 나무배트만 탓하는 것은 무언가 부족하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선수들의(엄밀하게는 학부모들의) 투수 선호 의식 때문이다.
야구를 잘 하는, 또는 우수한 자질을 갖춘선수가 고교시절 4번타자 겸 에이스 투수 노릇을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 이승엽(요미우리 자이언츠)이나 이대호도 고교 때는 투수였다. 그렇다하더라도 특정 포지션인 투수에 대한 쏠림 현상은 우려할만한 수준이라는 게 일선지도자 등 야구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말이다.
심지어 어떤 학교에서는 너도나도 투수를 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투수는 20명이나 되는데 야수진을 구성하지 못해 애를 먹는다는 웃지못할 일도 일어났다고 한다. 왜 저마다 투수를 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바로 ‘돈이 되기’ 때문이다. 프로 지명을 받거나, 아니면 큰 무대인 미국으로 가게 되면 일반 야수보다는 아무래도 투수가 목돈을 만지기 쉽고 실제로도 그렇다. 1994년 박찬호가 메이저리그로 건너 간 이후부터 슬금슬금 생겨나기 시작한 현상이다.
국내 프로에 입단하더라도 투수들의 몸값이 타자에 비해 훨씬 높은 것이 엄염한 현실이다. 묹문제는 이같은 기현상으로 인해 정작 한국야구가 속골병이 들고 있다는 것이다.
김인식 한화 이글스 감독은 최근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 프로야구가 위기에 빠질 것이다. 쓸만한 타자들이 너무 없다”고 한탄했다. 양준혁, 심정수 두 노장에 대한 의존도가 큰 삼성의 선동렬 감독도 “2군에서 타자를 끌어올려 쓰려고 해도 자질을 갖춘 선수가 안보인다”고 말한 적이 있다.
프로야구 지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뛰어난 투수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몸값은 잔뜩 부풀려져 있지만 거액을 받고 프로에 들어가 제 기량을 발휘하는 선수는 가뭄에 콩나듯 적다.
김경문 두산 베어스 감독은 “고교 때 투수들이 스피드를 내는데만 신경을 쓰는 것 같다. 스카우트 초점이 잘못 됐다. 다듬어야할 기본이 부족하다”고 꼬집기도 했다.
1980년대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왼손교타자였던 장효조 삼성 스카우트팀 부장은 “대구, 경북 지역 선수들을 지도하기 위해 다니다 보면 손바닥이 맨숭맨숭한 선수들이 많다. 그 이유를 물어보면 장갑을 끼고 타격을 해서 그렇다고 말한다”며 혀를 찼다. 장 부장은 “그러면, 예전에 우리는 장갑을 끼지 않아서 손바닥에 굳은 살이 몇번이고 박혔다, 벗겨졌다 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기본적으로 선수들의 훈련량이 너무 적다. 기본적인 훈련이 너무 안돼 있다”고 지적했다.
학생야구 참모습이 사라졌다는 소리도 높다. 껌을 질겅질겅 씹거나, 목걸이를 하고 있는 선수들도 그리 보기 어렵지 않다. 특히 외야 뜬공을 때리고 잡힐 것 같으면 아예 1루로 절반도 달려가지 않고 중간에서 되돌아서는 한심한 장면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게 작금의 고교야구다. 일부 프로선수들의 못된 것만 잘 못 보고 배운, ‘일그러진 ’고교야구의 자화상이다.
학부모들의 입김에 놀아나는 일부 고교야구 감독들의 자세도 문제다. 일본 고시엔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출전 자체 만으로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대회 도중에 탈락하면 아쉬움의 눈물을 훔치며 고시엔 구장 그라운드의 흙을 긁어담고 소중히 간직하는 그네들의 자세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홍윤표 OSEN 대기자
8월 15일 제37회 봉황기 전국고교대회 2회전에서 주도성의 3타점 싹쓸이 끝내기 안타로 4-3 역전승을 거둔 효천고 선수들이 화순고 선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황세준 기자 storkjoon@osen.co.kr
화순고의 공격, 8회 초 2사 후 김상은이 내야안타를 치고 나가자 덕아웃의 동료들이 성원을 보내고 있다.
8월 15일 봉황기대회 2회전에서 광주일고의 허경민의 파울플라이를 신일고 3루수 이제우가 전력질주하면서 잡으려고 했으나 놓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