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선동렬(44)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주니치 드래건스가 아니라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부질 없는 가정이지만 아마도 일본 프로야구 역사의 일부가 달라졌을 것이다.
1996년부터 주니치가 센트럴리그 우승을 했던 1999년까지 4년간 선동렬은 통산 162게임에 등판, 10승 4패 98세이브, 평균자책점 2.70을 기록하고 무대를 내려왔다. 자못 아쉬웠던 점은 끝내 100세이브를 채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선동렬이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고 뛰었더라면, 주니치 시절보다 더 나은 성적을 올리고 팀을 정상으로 이끌었을 지도 모른다.
실제 선 감독이 주니치와 이적교섭이 한창이었던 1995년 말 해태 타이거즈 구단은 양다리를 걸치고 요미우리 구단과도 협상을 벌였다.
처음에는 일본으로 보내는 것 자체를 반대했던 해태는 주니치에 이어 요미우리가 스카우트 손길을 뻗치자 직접 협상 테이블에 나서 합의 단계에까지 이르게 됐다. 그러나 막판에 방향을 급선회하는 바람에 결국 선동렬은 주니치 유니폼을 입게 됐다.
당시 합의가 깨진 다음 요미우리 구단은 “외국선수 스카우트를 많이 해봤지만 이런 일은 처음 당해 본다. 요구조건을 다 들어줬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선동렬의 트레이드는 우리 팀과 해태간의 거래를 떠나 한·일 양국간의 거래라고 할 수 있는데 합의가 지켜지지 않아 매우 유감”이라고 말한 바 있다. 훗날 해태와 주니치간에 사전 비밀각서를 교환한 것으로 밝혀져 파동이 일었고, 이 사태로 해태 사장과 단장이 전격 경질되는 곡절도 겪었다.
어쨋든 요미우리는 1년 뒤 조성민(34. 한화 이글스)을 데려가 아쉬움을 달랬고 그 이후 1999년 말에 정민철(35. 한화 이글스), 2000년 말에 정민태(37. 현대 유니콘스)를 잇달아 영입했으나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2004년에 일본 지바롯데 마린스로 이적한 이승엽(31)이 2006년 요미우리로 옮기면서 요미우리 구단은 한국 팬에게도 성큼 다가왔다. 허구헌날 중계를 하는 바람에 이젠 아주 익숙한 이름이 된 것이다.
일본 프로야구의 역사는 바로 요미우리의 역사라고 해도 그리 지나치지 않다. 심지어 일본의 경제를 요미우리 성적이 좌우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이고 일본 야구팬은 ‘교징(巨人의 일본말)과 ‘안티 교징’으로 양분할 지경으로 요미우리 선호가 강하다.
당연히 요미우리는 모든 야구선수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일본프로야구 개인통산 최다인 3085안타의 주인공인 재일교포 장훈은 선수생활 막판에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고 뛰었고 개인통산 400승을 올린 가네다 마사이치도 요미우리를 거친 전설적인 한국인이다.
현재 이승엽과 더불어 요미우리 타선의 중추 구실을 하고 있는 다카하시 요시노부(32)는 8월30일 구단대표와의 협상을 통해 FA 권리행사를 포기와 동시에 요미우리 잔류를 선언했다. 등의 보도에 따르면 지난 4월에 이미 FA 자격을 얻었던 그는 “금액제시는 하지 않았지만 최저 4년간 계약보장이라는 말을 들었다. 은퇴할 때까지 요미우리에 머물러 달라는 대표의 요청에 동의했다”고 말했다. 누구나 동경하는 구단에 계속 몸담고 있기를 바라는 그의 소원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일본프로야구는 1934년 요미우리 구단의 창설로 싹이 텄다. 그 해 메이저리그의 올스타팀이 일본을 방문했고 일본의 에이스 사와무라 에이지 투수가 베이브 루스나 루 게릭 등 강타자들을 삼진으로 돌려세우자 일본 열도가 들끓었다.
일본야구는 제 2차세계대전중에 중단됐다. 전쟁통에 사와무라가 전사했고 ‘세이프’, ‘아웃’등 영어의 야구용어가 ‘요시(좋아, 자)’, ‘다메(안돼)’ 등의 일본어로 바뀌는 웃지못할 일도 생겼다. 전후 패전의 실의에 빠진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 빠르게 자리잡았던 일본야구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일본야구에 능통한 로버트 화이팅은 라는 저서에서 미국의 학자 도널드 로딘의 말을 빌려 이렇게 표현했다.
‘일본인의 마음에 집단주의와 투쟁심을 야구라는 스포츠가 상징한다. 야구는 그네들에게 충성심, 명예, 용기라는 전통적인 미덕을 길러주기 때문에 시대의 새로운 무사도 정신을 상징한다’
로버트 화이팅은 일본프로야구판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요미우리 구단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그는 일본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요미우리신문과 호치신문을 자매회사로 두고 있는 요미우리 구단이 일본야구계에 ‘악의 존재’로 군림하고 있다는 논조를 편다.
2001년 긴테쓰 버팔로즈 소속으로 한 시즌 개인 최다홈런(55개) 기록에 도전했던 터피 로즈는 기록보유자인 왕정치 감독의 다이에 호크스(현 소프트뱅크 호크스) 투수진이 그에게 볼넷을 연발하며 기록 저지에 나섰던 일을 경험했다. 2004, 2005년 요미우리에도 적을 두었던 터피 로즈는 그 해 55홈런을 날려 왕정치 기록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데 그쳤다. 그는 2005년의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일본 프로야구에는 암묵적인 레드카드가 있다. 아무도 뭐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확실히 존재한다. 예를 들어 삿포로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투구가 포수의 머리 위 30㎝정도 넘어 백네트로 날아갔다. 그런데도 주심은 나를 째려보면서 ‘스트라이크’라고 소리쳤다.”
최근 왼손엄지 관절염으로 고생하고 있는 이승엽이 심판의 노골적인, 또는 애매한 볼판정으로 골탕먹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승엽으로선 터피 로즈의 사례를 귀담아 둘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 외국인이 야구를 잘 하려면, 이같은 이중고, 삼중고를 딛고 일어서야한다.
홍윤표 OSEN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