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박(54) LG 트윈스 감독이 번트의 귀재, 또는 ‘번트를 지나치게 선호하는 지도자’라는 세간의 시각은 보편 타당성이 있는가.
살아가면서 철석같이 믿었던, 혹은 별 의심없이 기존의 주장을 받아들였던 하나의 사실이 어느 순간에 뒤집히는 경우를 우리는 목격하는 수가 없지 않다.
김 감독이 번트 작전을 많이 구사하는 지도자라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과의 우승 결정전에서 ‘신기(神技)’에 가까운 번트 성공으로 인해 김 감독과 번트를 등식화하는 인식이 더욱 강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결정전에서 감행한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는 ‘사인 미스’에 의한 운명의 장난으로 알려져 있고 실제 에도 그렇게 기술돼 있다. 하지만 부슬비가 내리고 있던 27일 잠실구장에서 만난 김재박 감독이 이런저런 번트 얘기 끝에 그 사실을 전면 부인하는, 다소 충격적인 일을 털어놓았다.
당시 김재박이 댄 번트는 사인미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아예 사인이 나오지 않았고 독단적으로 결행했다는 것이다.
김재박 감독은 “1-2로 쫓아가는 상황이었고 1사 주자 3루였기 때문에 어떻게 하던지 번트를 대서 동점을 만들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면서 “초구에 번트를 대려는데 일본 투수가 공을 빼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엉겁결에 풀쩍 뛰어올라 방망이를 맞히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벤치(어우홍 감독)에서 번트사인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는 게 김재박 감독의 회상이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야구사를 새로 써야할 판이다.
그 해 9월14일, 한국은 일본과의 야간 경기를 앞두고 오전까지 호주와 연장전을 치러 진땀을 뺀 끝에 7-6으로 이겼다. 7승1패로 일본과 공동선두를 이뤄 우승 결정전에 나간 한국은 미국과 대만 등 난적들을 물리친 선동렬을 앞세웠으나 2회 2실점한 후 무기력하게 이끌려 갔다. 7회까지 일본 선발 스즈키에게 단 1안타로 맥을 추지 못했던 것이다.
기적의 드라마는 8회 말에 일어났다.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된 심재원과 김정수가 안타와 2루타를 거푸 때려내 1-2로 따라붙었고 조성옥의 번트로 1사 3루가 됐다.
그 때 타석에 등장한 것이 바로 2번 타순의 김재박. 김재박은 바깥쪽으로 높게 날아드는 볼을 순간적으로 마치 개구리가 점프하듯 치솟아오르며 방망이를 갖다 댔다. 천행으로 방망이 끝에 맞은 볼이 3루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갔고 3루주자 김정수와 김재박은 죽자사자 뛴 끝에 모두 살아 동점이 됐다. 그 직후 한대화의 역전 결승 3점포가 터졌지만 김재박의 번트는 야구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됐다. 한국은 김재박의 번트로 기사회생해서 결국 5-2로 이겨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사상 첫 우승을 일궈냈다.
여태껏 그 번트는 김재박이 당시 어우홍 대표팀 감독의 사인을 잘못 읽어서 댄 것으로 알려져 왔다. 1999년 대한야구협회와 한국야구위원회(KBO)가 공동으로 펴낸 에서 그 대목을 살펴보자.
“김재박의 번트는 흔히 ‘신기’였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기술상으로는 그 말에 흠잡을 데가 없지만 작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벌금감’이었다. 원래 번트사인은 오른손으로 모자를 만지는 데서부터 시작하기로 돼 있었고 왼손에 의한 것은 아무 내용이 담겨 있지 않은 가짜 사인이었다. 3루주자 김정수는 이 사인을 정확히 읽었으나 김재박만 사인을 잘못 읽고 부리나케 번트를 댄 것이었다. 김재박 외에 또하나 사인을 오판한 사람이 있엇다면 그것은 피치아웃한 일본의 구원투수였다. 그러나 결과가 좋았으니 모든 것이 무죄가 아니라 표창감이었다”
바로 이 대목이다. ‘김재박만 번트사인을 잘못 읽은 것’이 아니라 아예 김재박은 사인이 나오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스스로 결정해서 번트를 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재박 감독은 왜 이제서야 이같은 사실을 털어놓은 것일까.
“어우홍 감독이 기자들에게 사인미스라고 말씀하시는데 굳이 토를 달 이유가 없었다”고 그는 웃으며 말했다. 우승을 한 마당에 대세에 지장이 없는 곁가지 일로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기왕 말이 나온 김에(당사자의 주장) 잘못된 사실관계는 바로잡아 야구사를 다시 정리할 필요는 있겠다.
그야 어쨋든 ‘김재박과 번트는’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흔히 번트는 역설적으로 가장 적극적인 공격이라고 한다. 특히 한 점차 승부의 박빙의 순간에는 번트 하나로 승부가 엇갈리는 경우가 흔하다. 당사자로선 가장 피말리는 작전이 번트다.
김재박 감독의 번트관을 엿볼 수 있는 얘기를 한 번 들어보자. 김 감독은 “올해 LG가 성적을 내지 못한 것은 번트를 못대서 그런 것이다”고 잘라 말했다. “아직 선수들의 작전 수행능력이 떨어져서 실수한 적이 많았다. 현대 시절 번트 얘기는 항상 진 팀에서 나왔다. ‘번트를 해서 점수를 내면 관중이 줄 것이다’ 이런 말도 진 팀에서 나온 것”이라는 소리까지 했다.
김 감독은 “이겨야 하는데 삼성같이 좋은 선수가 많으면 모를까, 사실 좋은 선수가 많으면 번트를 왜 하겠나. 그렇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쭉 3, 4번 치던 선수는 번트를 대라고 해도 못 댄다. 히트 앤드 런이나 팀 배팅을 해주는 그런 자세가 중요하다. 희생하는 자세, 그래야 다른 선수들도 보고 자극을 받는다”고 강조했다.
김 감독은 “올해는 작년 가을 LG 감독이 된 다음 대표팀에 가 있느라 선수들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채 시즌을 맞았다. 그렇지만 내년 시즌에는 가을 호주전지훈련(10월 20일께 시작) 때부터 선수들을 직접 챙기겠다”면서 “내년에는 3, 4위에 들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것이 목표이고, 2009년에는 우승을 노려보겠다”고 밝혔다.
현대에서 11년간 사령탑에 앉아 있는 동안 5차례나 한국시리즈에 진출, 부임 첫 해(1996년)에만 패권 쟁취에 실패했을 뿐 그 후 4차례 한국시리즈에서는 모조리 팀을 정상으로 이끌었던 김재박 감독. 그는 이렇게 다짐했다. “내년에는 LG가 관중 100만 명을 넘어설 수 있도록 하겠다”고. ‘여시(여우의 경상도 방언)’김재박 감독의 LG 개조작업이 어떤 결과를 낳을 지 궁금해진다
홍윤표 OSEN 대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