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속설 중에 ‘위기 다음에 찬스-찬스 다음에 위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점 위기를 넘기면 이상하게도 곧이어 공격에서 득점 기회를 맞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거꾸로 득점 기회를 놓치면 곧바로 다음 수비 때 실점 기회를 제공한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위의 속설은 야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인데 수 십 년 간 야구 경기를 관전한 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 속설에 걸맞는 경기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서 우리나라와 일본의 예선전 마지막 경기였습니다. 한국은 마쓰자카를 상대로 1회초에 김동주의 2루타, 이승엽의 투런 홈런 등으로 4점을 먼저 뽑아 쉽게 이기는 듯했으나 정민태-구대성이 이어 던지며 9회초까지 5-5 동점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9회말 수비에서 2사 1,2루 때 다구치에게 우전안타를 맞았습니다. 본래 중견수였다가 3회부터 우익수로 나선 이병규는 이 타구를 제 자리에서 한 걸음 달려나와 잡았는데 2루에서 쏜살같이 홈으로 대시하는 주자를 잡기에는 벅차 보였습니다. 끝내기 적시타로 점수를 내줘 결선 진출이 좌절될 것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더구나 이병규가 국내 무대서 보여준 외야 송구 실력은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병규는 공을 잡자마자 사력을 다해 던졌고 이 송구는 홈플레이트를 지키고 있던 포수 홍성흔에게 정확히 직결돼 2루주자 헤이마를 극적으로 태그아웃 시킬 수 있었습니다. 망연자실한 표정의 일본 선수단은 믿어지지 않는다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고 한국 선수단의 환호성은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사기가 충천한 한국은 곧이어 10회초 실책으로 출루에 성공한 다음 김기태의 안타와 이승엽의 적시타, 정수근의 희생타로 2점을 뽑고 10회말 임창용이 1점으로 막아 7-6으로 승리하고 4강에 올라가 다시 일본과 대결, 마쓰자카를 상대로 3-1로 이겨 동메달을 따냈습니다. 시드니 올림픽 일본전에 이어 생각나는 경기는 지난해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대회 아시아라운드서 일본에게 역전승을 거둔 장면입니다. 우익수 이진영(SK)은 1차전 대만전 3회 2사 2루에서 린즈성의 파울타구를 전력질주해 펜스에 부딪치며 잡아낸 데 이어 8회에도 린즈성의 우전안타성 타구를 슬라이딩 캐치하며 앞구르기를 해 찬사를 받았습니다. 2-0승. 또 이진영은 3차전인 일본전에서 0-2로 뒤진 4회말 2사 만루 때 니시오카의 우익수 왼쪽으로 빠지는 날카로운 타구를 혼신의 힘을 다해 쫓아가 역모션으로 몸을 날려 낚아채며 한 바퀴 구르는 묘기를 연출했습니다. 타구가 빠지면 3점을 한꺼번에 내줘 절망적일 상황에서 이진영의 수비는 한국 선수들에게 힘을 주어 5회에 한 점을 추격하고 8회에는 1사 1루에서 이승엽이 결승 투런 홈런을 뿜어 3-2로 역전승, 아시아 1위로 본선에 출전했습니다. 이진영에겐 '국민 우익수'라는 호칭이 붙었죠. 이번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한화 이글스는 ‘위기 다음에 찬스’를 살려 5-0으로 넉넉하게 낙승했습니다. 지난 9일 대전에서 열린 경기에서 삼성 라이온즈가 1회초 1사 1, 2루, 2회초 1사 1, 2루의 기회를 잇달아 잡았으나 후속타자들이 연거푸 삼진으로 물러나자 2회말 공격에서 이범호가 2루타를 때리고 연경흠이 우전 적시타를 날려 선취점을 뽑았습니다. 4회초에도 삼성이 1사 후 김한수의 2루타로 득점권에 나갔으나 점수를 얻지 못하자 한화는 4회말 김태균이 솔로 홈런을 날려 2-0으로 앞섰습니다. 그리고 삼성은 0-3으로 뒤진 6회초엔 심정수의 볼넷, 박진만과 진갑용의 연이은 좌전안타로 무사 만루의 황금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이날 2안타를 때린 김한수가 짧은 우익수 앞 범타로 물러난 데 이어 박정환과 강봉규는 류현진에게 잇따라 삼진을 먹어 한 점도 뽑아내지 못해 결국 영봉패를 당했습니다. 2~3점을 내줄 수 있었던 위기를 벗어난 한화는 6회말 크루즈의 안타에 이어 이범호가 투런 호머를 날려 승부에 쐐기를 박았습니다. 10일 대구에서 거행된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도 한화는 2회에 삼성 진갑용에게 솔로 홈런을 허용한 뒤 4회에는 김재걸에게 안타, 양준혁에겐 볼넷을 내줘 무사 1, 2루에서 심정수를 삼진으로 돌려 세운 다음 박진만에게 안타를 맞아 1사 만루의 위기를 맞았지만 구원투수 최영필이 진갑용을 2루수 앞 병살타로 막아내 커다란 위기를 넘겼습니다. 하지만 한화는 ‘위기 다음에 찬스’를 살리지 못하고 그후 공격에서 범타로 일관했고 삼성은 한화가 점수를 내지 못하자 6회말에 양준혁이 투런 홈런을 날려 승기를 잡으며 결국 6-0으로 대승해 전날 빚을 갚았습니다. 야구계의 속설 ‘위기 다음의 찬스’는 이렇게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는 경우도 잦습니다. '홈런성 파울 다음에는 삼진’이라는 속설도 그렇습니다. 10여 년 전 강타자 강영수(삼성-OB-태평양-현대-쌍방울)가 잠실경기에서 홈런성 파울을 두 개 날린 다음에도 홈런을 치는 것을 보고 “속설이 맞지 않을 때도 있구나”하고 웃어 넘긴 적이 있는데 속설은 속설에 그치는 모양입니다. 10일 2차전 삼성의 4회말 1사 만루서 진갑용의 2루 땅볼 때 한화 유격수 김민재가 1루주자 박진만을 2루에서 포스아웃시킨 뒤 병살로 연결하며 실점 위기를 모면하는 장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