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표의 발 없는 말]존경받는 야구인을 보고 싶다
OSEN 기자
발행 2007.10.12 11: 02

일본 야구 대표팀에는 등번호 3번이 없다.
호시노 센이치(60) 전 주니치 드래건스 감독이 사령탑에 앉아 진두지휘하고 있는 일본대표팀은 일본 야구의 영웅 나가시마 시게오(71) 요미우리 자이언츠 종신 명예 감독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아예 등번호 3번을 결번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자못 이례적인 이같은 조치는 호시노 감독의 뜻에 따른 것이다.
‘미스터 자이언츠’, ‘미스터 베이스볼’로 불리는 나가시마 요미우리 종신 명예 감독은 지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일본야구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 됐으나 그 해 3월 뇌경색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지휘봉을 놓고 투병생활을 해 왔다. 일본팀은 당시 나가시마 감독이 직접 ‘3’자를 써넣은 그의 유니폼을 벤치에 놓고 전의를 불태운 결과 동메달을 차지했다. 나가시마 감독은 현재 일본 대표팀 상담역을 맡고 있기도 하다.
2008 베이징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는 것은 물론 사상 첫 금메달을 노리고 있는 일본 대표팀은 이처럼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을 기울이며 총력전을 전개하고 있다.
나가시마 감독은 일본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일본 야구의 상징적인 존재이다. 2차세계대전 패전 후 나가시마 감독은 일본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인물이었다. 일본 정부는 2005년 나가시마 감독을 문화공로자로 선정했다. 일본 프로야구 사상 야구인이 문화 공로자로 선정된 것은 1992년 가와카미 전 요미우리 감독(그는 1965~1973년 요미우리 9연승 신화를 일궈낸 지도자이다) 이후 두 번째다. 나가시마 감독은 2002년 문부과학성 스포츠 공로자로도 뽑힌 바 있다.
일본 정부는 ‘어린이들에게 야구를 할 수 있는 계기를 심어주어 야구 인구 확대에 공헌하고 프로야구 감독으로 많은 팬을 확보, 프로야구의 발전에 공헌했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해 일본 대표팀의 동메달 수상에 공헌한 것’ 등을 그의 수상자 선정 이유로 들었다.
나가시마 감독은 “평소 야구는 인생 자체라고 생각했다. 외길을 걸었던 것이 평가를 받아 영광이다. 프로야구는 팬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고 소감을 말했다.
나가시마 감독은 요미우리의 명 3루수로 왕정치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과 ‘O-N’타선을 이루며 요미우리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1958년 요미우리 입단 첫 해 홈런왕과 타점왕을 차지하며 신인왕에 올랐고 한 해 뒤에 입단한 왕정치 감독과 함께 요미우리의 일본시리즈 9년 연속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17시즌을 뛰고 1974년 은퇴할 때 까지 수위타자 6회, 홈런왕 2회, 타점왕 5회, 안타왕 10회, 페넌트레이스 MVP 5회를 차지했다.
은퇴와 동시에 1975년 요미우리 감독을 맡았고 1980년 지휘봉을 놓았다가 팬들의 성원으로 1993년 복귀, 2001년까지 다시 팀을 이끌었다. 감독으로서도 일본시리즈에서 2회 우승을 기록했다.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예선부터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고 올림픽 출전권을 따낸 나가시마 감독이 올림픽을 앞두고 쓰러지자 일본 매스미디어들은 그의 병세를 매일 중계할 정도로 일본인들의 관심을 대변했다.
지난 10월 2일 일본 오이타현 벳푸시에서 철완 이나오 가즈히사(70)의 ‘이나오 기념관’이 개관됐다. 새로 건립한 벳푸시민구장에 들어선 그 기념관에는 니시데쓰의 황금시대 에이스인 이나오 씨의 족적이 담긴 각종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그의 투구폼을 본 뜬 모형 동상도 세워졌다.
그는 “이 폼을 어린이들이 보고 흉내낸다면 좋겠네”라며 농담 섞인 소감을 밝혔다. 벳푸는 이나오 씨의 고향. 벳푸시는 “이나오기념관과 벳푸시민구장을 통해 벳푸나 오이타의 어린이들의 야구를 지원할 것”이라며 벳푸를 야구진흥의 거점으로 삼을 방침을 천명했다.
이나오 씨는 1950년대 후반부터 세이부 라이온즈 전신인 니시데쓰 라이온즈에서 활약하면서 일본 프로야구 사상 저팬시리즈 최다인 개인통산 9완투 및 11승 기록을 지니고 있다. 승률왕 2회, 평균자책점 1위 5회(1956~1958, 1961, 1966년), 다승왕 4회(1957, 58, 1961, 1963년) 등의 업적을 남겼고 1961년에는 경이적인 한 시즌 최다 기록인 42승을 올리기도 했고 8년 연속 20승, 30승 이상 4차례, 20연승 등 그가 세운 숱한기록은 일일이 손에 꼽기도 어렵다. 일본 프로야구 기록의 전설이라고 해도 그리 지나치지 않다.
1993년에 그는 야구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올 시즌을 끝으로 야쿠르트 스왈로스 사령탑에서 물러난 후루타 아쓰야(42) 전 감독은 1990년대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포수로 군림했던 인물이다.
선수 겸 감독으로 야쿠르트 지휘봉을 흔들었던 그는 지난 10월 5일 올 시즌 야쿠르트 본거지인 진구구장 최종전에 포수 겸 5번타자로 선발 출장, 은퇴경기를 치렀다. 그날 진구구장에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올 시즌 최다인 3만 3027명의 관중이 운집했다.
그는 야쿠르트가 올해 센트럴리그 최하위(6위)로 처지자 미련 없이 스스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선수생활 10년 포함 18년간 야쿠르트 유니폼을 입었던 그는 선수노조회장으로 일본 프로야구 사상 첫 파업을 주동했고 파격적인 플레잉 감독으로 올 시즌 팀 재건을 외쳤으나 끝내 좌절하고 말았다. 일본 매스컴은 그를 일러‘야구계의 혁명아’라고 했다. 야쿠르트 선수들 5일 경기 후 그를 5차례나 ‘공중부양(헹가래)’시켰다.
그는 “18년간 정말 감사했다. 다시 만나길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수위타자 1회, MVP 2회, 골든글러브 10회, 베스트나인 9회 등을 수상했던 그는 그런 말을 남기고 홀연히 그라운드를 떠났다.
한국에서 존경받는 야구인은 누구인가
흔히 한국프로야구와 일본프로야구의 격차를 ‘10년이다, 아니 20년이다’고 입방아를 찧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일본 프로야구판의 3가지 사례를 눈여겨볼 때, 우리가 그네들에 비해 뒤처져 있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한국은 아직도 개인 기념관은 물론 야구박물관조차 없다. 출범 4반세기를 지난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언젠가 있게될 야구박물관과 명예의 전당 개관에 대비, 사료들을 모으고는 있으나 현재로선 기약이 없다.
한국프로야구도 30년이라는 세월을 눈앞에 둔 현 시점에서 야구 1세대들이 사라지기 전에 하루 빨리 명예의 전당을 열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전할 필요가 있다.
야구팬들이 진정으로 아끼고, 떠받들고 존경할만한 야구인이 있는가. 그런 물음에 선뜻 답할 야구인은 얼마나 될까. 야구 기량 향상도 좋지만, 우리가 일본을 따라잡으려면, 야구인들이 팬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팬 여러분이 존경하는 야구인은 누구인가?
홍윤표 OSEN 대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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