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쓸쓸한, '산울림' 김창익이 떠난 자리
OSEN 기자
발행 2008.02.03 09: 39

[OSEN=최영균의 인사이더] 형제 그룹 산울림의 막내이자 드러머인 김창익이 안타까운 사고사로 우리 곁을 떠났다. 산울림을 빼고는 한국 가요사가 제대로 써질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음악적 업적을 남긴 그룹의 멤버 한 명이 떠났지만 세상은 너무 조용하다. 가요 관련 언론들만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관심을 갖고 있다. 그마저도 최근에는 배우로 활발히 활동 중인 맏형이자 리더 김창완의 동생을 잃은 슬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산울림은 한국 가요의 중요한 두 분야에서 결정적인 업적을 남겼다. 펑크와 사이키델릭을 넘나드는 독창적인 록을 구사, 록의 본산인 영국과 미국의 당대 록 그룹과 비교해도 전혀 아쉽지 않은 음악들을 선보였다. 음악적 가치도 중요하지만 록의 근본정신인 ‘자유’가 음악적으로 멋지게 구현된 이들의 음악은 후대 음악인들의 정신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니 벌써’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내 마음(은 황무지)’같은 히트곡은 물론 음반 곳곳 숨어 있는 실험적 곡들은 유럽의 아트 록을 연상케 할 정도로 심오하고 파격적이었다. 산울림의 또 하나 큰 업적은 서정적 발라드다. 물론 두 동생이 빠지고 김창완의 원맨 밴드가 된 이후 산울림의 곡에 발라드가 많긴 하다. 하지만 이후 1980년대 후반부터 만개하는 한국형 발라드의 가장 굵은 뿌리 중 하나는 분명 산울림이고 그 산울림의 음악은 창훈 창익 형제 탈퇴 전후가 음악적으로 하나의 맥락을 지니고 있어 굳이 구분할 이유는 없다. 이렇듯 한국 가요, 나아가 한국 대중문화의 레전드라 할 만한 산울림의 한 축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는데 한국 사회는 너무도 덤덤하다. 아니 사회나 혹은 정부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가요계마저 조용한 것이, 후배 로커들에게서 별다른 추모가 들려오지 않는 것이 너무도 아쉽다. 물론 산울림의 음악적 ‘혼’은 김창완이다. 그리고 김창익은 전업 음악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김창완도 뜻이 잘 맞는 두 동생이 없었으면 무한히 자유로운 산울림의 음악은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김창익이 본업은 사업이고 간간이 형제들과 모여 산울림 공연을 해오긴 했지만 지하실에 드럼을 놓고 공연을 준비해 온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그 어떤 프로페셔널 현역 로커에 견주어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산울림이 영국 같은 나라에서 나온 그룹이라면, 대중 문화에 대한 경시 풍조가 없고 음악적 가치가 오래 기억되는 나라에서 태어난 밴드라면 지금쯤 김창익에게는 귀족의 칭호가 추서되고 추모의 열기가 음악계는 물론 일반 대중에게도 뜨거웠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문화적 사대주의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그러하다. 음악 만으로, 록으로는, 밴드로는 먹고 살기 힘들어 회사를 다니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사업을 하고 그러면서도 음악에 대한 뜨거운 애정은 가슴 속 깊이 간직했던 진정한 음악인 한 명이 우리 곁을 떠났다. 한국은, 가요계는 무심하지만 당신의 음악은 영원히 존경 받을 것이니 좋아하는 드럼을 치기 위해 지게차를 안 타도 되는 천국에서는 늘 감동의 드럼 소리 들려 주시길 빕니다. /대중음악가이드 ck1@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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