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란듀란, 음악성이 외모보다 갈수록 빛난 30년
OSEN 기자
발행 2008.02.24 09: 19

[OSEN=최영균의 인사이더] 꽃미남 가수(혹은 그룹)의 원조는 전 세계적으로 보면 듀란듀란이었다. 1980년대 중반, 브로마이드를 코팅한 책받침으로, 좀더 생활 형편이 여유 있었다면 1984년 미국 아레나 라이브 투어의 공연 실황 비디오를 통해 한국 소녀들은 듀란듀란을 로망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이들을 능가하는 아름다움을 갖춘 남자 그룹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을 만큼 이들의 외모는 절대 지존이었다. 듀란듀란이 오는 4월 17일 19년 만에 내한 공연을 갖는다.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갖고 있는 이들은 내년이면 데뷔 30년을 맞는다. 듀란듀란의 긴 생명력은 화려한 외모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이들의 음악성을 되짚어 보게 만든다. 사실 듀란듀란의 최전성기 시절 이들의 음악에 대한 평가는 별로 없었다. 팬들은 ‘존 테일러(베이스)가 한국에서는 가장 인기 있지만 미국이나 유럽은 사이몬 르 봉(보컬)이라더라’라든지 ‘존 테일러와 닉 로즈(키보드) 중 누가 가장 아름다운 남자인가’ 등 외모에 관한 논쟁에 주로 몰입했다. 대개 남자 팝음악 팬이었던 듀란듀란의 ‘안티’들은 이들의 외모를 은근히 시샘하며 제대로 된 분석 없이 신시사이저에 기반한 이들의 음악을 댄스 음악으로 단정짓고 평가절하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듀란듀란은 음악적으로 아티스트였다. 이들 만의 음악색이 확연히 드러나는 멜로디 라인, 신곡마다 새로웠던 비트, 신시사이저에 뉴웨이브 음악에 기반하면서도 펑크를 도입한 ‘Notorious’처럼 음악적 도전 등 자신 만의 음악색을 구축하면서도 새로운 시도도 쉼 없이 추구한 제대로 된 음악인이었다. 음악 외적으로는 MTV가 막 출범한 초창기인 1982년 발표한 앨범의 싱글 커트곡 ‘Hungry Like the Wolf’ ‘Save a Player’ ‘Rio’ 뮤비를 스리랑카와 안티구아를 돌며 제작, 향후 열린 뮤비 시대의 선도자라는 평도 듣고 있다. 공연에서 무대 뒤 스크린을 설치하고 이를 활용한 최초의 가수도 듀란듀란이다. 다른 가수들의 곡 제작에 참여할 만큼 멤버들의 뛰어난 음악적 능력은 외부에서도 인정 받았다. 닉 로즈는 80년대 빅히트곡 중 하나인 카자구구의 ‘Too Shy’를 프로듀싱하기도 했다. 듀란듀란은 이런 모든 음악성을 인정 받아 1993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듀란듀란이 한국에 돌아온 지금 한국은 2차 아이돌 가수의 시대를 맞고 있다. 1990년대 중후반 H.O.T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1차 아이돌 가수의 시대에 이어 지난 해 빅뱅 원더걸스 FT아일랜드 등이 인기 가수의 자리를 독차지하면서 아이돌 가수의 시대가 재래했다. 꽃미남 그룹, 다른 말로 하면 아이돌 그룹의 원조인 듀란듀란은 데뷔 후 30년을 활동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1차 아이돌 가수 시대를 누렸던 가수 중에 10년이 지난 지금 ‘가수’로 살아남아 있는 이들은 거의 없다. 아이돌 가수 시대도 두 번째 차수에 접어들었다. 한국에서도 화려한 외모, 10대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로 가수 생활을 시작했더라도 음악성으로 30년을 활동할 수 있는 듀란듀란 같은 가수가 이제는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대중문화가이드 ck1@osen.co.kr

Copyright ⓒ OSEN.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