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31일, 밤 10시 30분께. 잠실 구장 하늘에 요란스런 축하 불꽃놀이가 이어지는 가운데 그라운드에서는 SK 와이번스의 우승 시상식이 열리고 있었다. 관례상 준우승팀인 두산 베어스 선수들도 마지못해 줄을 지어 그라운드로 나갔다. 그 대열에 김현수(20)는 보이지 않았다.
한창 시상식이 진행되고 있는 도중, 두산 구단 라커 출입문이 조용히 열리면서 김현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김현수는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덕아웃 옆으로 향했다. 남들의 시선이 별로 미치지 않는 그곳에서 김현수는 시상식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자위엔 아직 물기가 채 가시지 않았고 충혈돼 있었다.
때마침 “한국시리즈 MVP 최정!”을 외치는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그라운드에 울려퍼졌다. 관중석에서 “최정”을 연호하는 소리가 낭자했다. 그 순간, 김현수는 발걸음을 돌려 라커쪽으로 사라졌다. 오만가지의 상념이 그의 머리 속을 채웠을 것이다. 김현수보다 한 학년 위인 최정은 김현수와 마찬가지로 고교시절 최고타자에게 주는 이영민 타격상 수상자였다. 둘은 프로에 들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의의 경쟁을 펼쳤던 터였다.
5차전 9회말 1사 만루에서 때린 그의 타구는 야속하게도 SK 투수 앞으로 굴러갔고, 그것으로 한국시리즈는 막을 내렸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김현수의 한 방이 터졌더라면, 프로야구 역사의 수레바퀴는 다른 방향으로 굴러갔을 지도 모른다. 아직 스무 살에 불과한 김현수가 받았을 그 순간의 충격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자신으로 인해 만사가 물거품이 됐다는 자책감과 부끄러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생각들이 교차했을 것이다.
드라마가 없었던 2008 한국시리즈. 반전의 여지조차 없이 2차전 이후 내리 밀려버렸던 두산으로선 김현수가 가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우뚝설 수도 있었건만, 끝내 그런 장면은 볼 수 없었다.
김경문 감독은 5차전이 끝난 뒤에 가진 기자회견 자리에서 한 기자의 질문에 단호하게 말했다. “김현수보다 나은 타자가 누가 있습니까. (9회말 상황에선) 사인을 안내고 그냥 믿고 맡겼습니다. 큰 경험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베이징 때 그랬던 것처럼 야구를 잘 할 때 하늘 높이 떠있다가 방심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김현수는) 우리 팀뿐만 아니라 앞으로 한국을 대표할 타자입니다. 다음에 찬스가 오면 현수가 우승시켜줄 겁니다.”
5차전 직후 허탈감에 빠진 두산 구단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현수가 FA가 되기 전까지는 구단에 우승을 안겨주겠지….”
김현수가 웃음을 되찾았다. 6일에 열린 올해 프로야구 종합 시상식장에 예전의 활달하고 씩씩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시종 웃음을 잃지 않았던 김현수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 동안 아버지와 낚시를 다니며 머리를 식혔다. 페넌트레이스 때처럼 쭈욱 위에 있었다면 자만했을 것이다. 좋은 경험을 했다. 새롭게 노력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에 덧붙여 김현수는 “내년에는 끝까지 웃을 수 있도록 하겠다. 타율이 2할대로 떨어지더라도 홈런 30,40개를 칠 수 있는 타자가 되도록 하겠다”고 변신을 선언했다. 교타자에서 장거리형 타자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를 다진 것이다.
김경문 감독은 올 시즌 내내 “타율이 2할7푼대로 떨어지더라도 (김현수를) 홈런 20개 이상 칠 수 있는 거포로 키우겠다”고 말하곤 했다. 김현수의 새로운 목표와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이제 김현수는 시작일 뿐이다. 올해 한국시리즈에서 겪은 시련은 성장통일 따름이다. 숱한 난관과 험한 길이 그의 앞에 도사리고 있다. 승부세계가 그런 것이다. 그것을 이겨낸 자만이 더 큰 영광을 누릴 수 있다.
김현수는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픈 마음을 추스리고 좌절하지 말고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한국야구의 미래가 보인다. 올해의 뼈아픈 경험을 자양분으로 삼아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큰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기쁨의 눈물을 흘릴 그날이 올 때까지.
돌이켜보면, 2006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신고선수로 출발해 스산함과 온갖 어려움, 괴로움을 용케 딛고 일어섰던 김현수였다. 그 초심을 잃지 말아야한다.
홍윤표 OSEN 대표기자
6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렸던 ‘2008 삼성 PAVV 프로야구 최우수선수(MVP)/최우수신인선수 투표 및 각 부문별 시상식’'에서 MVP에 오른 SK 김광현에게 김현수가 구김살 없는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축하 꽃다발을 건네고 있다.
한국시리즈 5차전 직후 실의에 잠겼던 때와는 달리 김현수는 타이틀 시상식에서 예전의 웃음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