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술의 분위기를 공감하게 만드는 영화, ‘낮술’
[OSEN=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워낭소리’의 폭발적인 관심 이후, 늘어난 독립영화에 대한 관심 때문일까. 단돈 1천만 원의 제작비를 들여 만들어진 독립영화 ‘낮술’의 흥행이 심상찮다. 개봉 열흘만에 관객 1만 명을 동원한 이 독립영화는 지금 2만 명 고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초점을 읽고 흔들리는 화면과 가끔씩 의식되는 연기, 매끄럽지 않은 편집 등등, 적은 제작비와 아마추어리즘을 느끼게 하는 영상이 현실이지만, 이 가난한 영화가 주는 감흥은 기대 이상이다. 도대체 ‘낮술’의 그 무엇이 이런 감흥을 만드는 것일까.
‘낮술’은 단순히 낮술을 먹고 일어난 해프닝을 다루는 영화가 아니다. 이것은 낮술이라는 하나의 분위기를 다루면서, 그 기대와 배반의 코드가 우리네 일상에서의 경험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영화다. 아마도 낮술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스트레스의 한 가운데 선 낮이라는 시간대에 입에 착착 달라붙을 것만 같은 술에 대한 욕망이 연거푸 몇 번 잔을 넘기다보면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곤 한다는 것을. 머리는 지끈지끈, 불콰한 얼굴은 후끈후끈, 곧 왜 낮술을 시작했을까 하는 후회가 들기 시작한다.
물론 전도유망한 직장에서 점심시간을 빌어 한 회식자리의 포만감이라면 다르겠지만, 모두들 일을 하는 낮 시간에 음습한 주점 모퉁이에 앉아 소주를 까는 이들의 심정은 언제나 적당한 괴로움과 욕망 그리고 곧 드러나는 욕망의 배반이 안주거리로 올라오게 마련이다. 이 낮술에서 갖게되는 정서 즉 기대감과 배반감 같은 것이 바로 ‘낮술’이라는 유머의 세계다.
영화의 도입부를 이루는 한 주점에서의 농담은 이 영화의 전체 구조를 그려낸다. 실연 당한 혁진(송삼동)에게 친구들은 정선으로의 여행을 제안한다. 정작 혁진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데, 친구들은 널 위해 가려는 건데 네가 빠지면 되느냐며 혁진을 몰아세운다. 어쩔 수 없이 가겠다고 약속한 혁진. 그러나 다음 날 정선버스터미널에는 혁진 혼자만 덩그라니 오지않는 친구들을 기다리게 된다.
아무런 기대감이 없던 혁진-기대감을 갖게 되는 혁진-기대가 무너지는 혁진-다시 기대하게 되는 혁진. 이 무한한 반복은 영화의 구조를 이루면서 동시에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낮술을 대할 때의 그 정조를 그대로 반복한다. 이렇게 한 바퀴를 빙 돌아온 혁진은 다시 이 이야기가 시작되는 정선 버스터미널로 돌아오는데, 영화는 그 끝 부분을 다시 처음 부분과 연결시키듯 끝냄으로써 이 낮술의 상황, 즉 기대와 배반의 연속이 우리네 삶에서 반복적으로 겪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낮술’의 이 반복적인 시퀀스들(이것은 마치 단순 반복적인 술 마시기의 동작 같다)은 그러나 이 가난한 영화 속에 지칠 줄 모르는 유머감각을 불어넣음으로써 이야기에 울림을 만든다. 그렇게 반복적으로 퇴적된 이야기는 마치 연거푸 마신 후에 자신도 알 수 없는 유쾌함에 빠져버리는 낮술의 위력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풀어헤친다. 독립영화라는 상대적으로 낮은 기대치에서 시작한 영화는 차츰 영화를 기대하게 만들고, 그 기대는 배반되지만 끊임없이 이어진다.
‘낮술’은 마치 배고픈 자들이 갖게 마련인 ‘기대 없음’을 술 한잔의 유혹으로 부추기는 영화로, 이것은 또한 저 독립영화가 가진 정서와 맞닥뜨리는 지점이기도 하다. 불황 속에서 당장 배가 고픈데 무슨 웃음이 나올까. 그럼에도 어떤 작은 기대감은 여전히 존재하며, 그것이 비록 배반으로 끝난다 하더라도 바로 그 욕망(혹은 꿈)으로 인해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을 특유의 유머로 전해주는 영화다. 그러고 보면 가난한 자들의 가장 큰 무기는 당장 배가 고파도 그것을 웃음으로 전화시키는 바로 이 유머감각이 아닐까. 비록 어둡고 음습한 술집에서의 낮술이지만 그 처절함 끝에도 웃음과 유쾌함만은 잃지 않는.
/정덕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mansuri@osen.co.kr 블로그 http://thek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