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시인 천상병은 생전에 야구광으로 자처했다. 그는 1963년 에 기고한 글을 통해‘나를 두고 야구광이라 일컬어주는 모양이다. 우리나라 글쟁이들은 시골 핫바지 출신들이 많아서 이지적인 경기인 야구는 알 턱이 없고…’라고 자랑하면서 ‘야구를 보는 재미는 투수가 던지는 볼의 묘미를 보는 재미요, 또 한 가지는 입씨름하는 재미’라고 주장했다.
40년도 훨씬 지난 옛적에 ‘천상 시인’인 천상병의 글에서 이같은 혜안을 발견하는 것은 자못 놀랍다. ‘입씨름 재미’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야구는 경기 자체도 물론 재미가 있겠으나, 때로는 장외 설전이 더욱 흥미를 끈다.
야구가 ‘말의 스포츠’라고 역설하는 이도 있다. 확실히 야구인들은 언어구사에 능하다. 이번 제 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통해 일본대표팀의 간판타자인 이치로(36. 시애틀 매리너스)의 입담이 다시 화제에 오르내린다. 지난 2006년 1회 대회 때부터 거친 표현과 독기서린 말로 워낙 한국팬들의 공분을 사왔던 터여서 그의 독설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의 말을 통해 한-일전은 장외에서 더욱 불붙는다.
승부세계는 순환한다. 절대 강자도 약자도 없다. 야구 열등국가였던 한국이 시나브로 일본을 따라잡자 이치로의 발언도 변화하고 있다. 이치로의 막말, 망언 수준의 극언은 한국 선수들은 물론 한국팬들도 강하게 자극한다. 그의 말에는 최고선수라는 자부심과 한국 선수들에 대한 우월의식이 그대로 묻어난다.
2006년 WBC를 앞두고 이치로는 “앞으로 30년간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주겠다”고 발언, 한국인들의 분통을 터뜨리게 했다. 그 후 이치로의 발언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는 했으나 한국을 자극하는 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일련의 발언들을 요약해 보자.
-이런 결과에 만족한다면, 나는 야구를 그만둬야한다. 오늘의 패배를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 우리들이 할 일이다. (2006년 3월5일. 제 1회 WBC 아시아지역 1차리그에서 이승엽에게 결승 2점홈런을 얻어맞고 일본이 한국에 2-3으로 진 뒤)
-나의 야구 인생에 있어서 가장 굴욕적인 날이다. 불쾌하다. (기분을 정리하는데) 시간이 걸릴 지도 모르겠다. (2006년 3월16일. 2차리그에서 한국에 1-2로 진 뒤)
-최고로 기분이 좋다. 이겨야할 팀이 이기지 않으면 안된다. 그 팀은 당연히 우리(일본)팀이라고 생각한다.
(한국팬들의) 야유가 심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만큼은 아니었다. (2006년 3월19일. 준결승전에서 한국에 6-0으로 이긴 후)
-오늘 2라운드 진출을 결정하고 싶었는데 달성하게 돼서 좋았다. (실력 차이는) 종이 한 장이다. (2009년 3월7일. 제2회 WBC 1라운드 한국전에서 14-2로 이긴 뒤)
-1점차라도 진 것은 진 것이다. 졌다는 사실에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 일본에서는 나로선 최후의 게임이다. 단지 한국전 뿐만 아니다(앞으로 일본대표로서 뛰지 않겠다는 의미). 오늘 압박감을 느낀 것은 저쪽(한국)일텐데, 두들겨 부쉈으면 상당히 큰 일이었겠지만 제자리로 돌아왔다. 전 대회의 일도 생각난다. (한국은) 힘이 있다. (2009년 3월 9일. 1라운드 1, 2위 순위 결정전에서 한국에 0-1로 패한 뒤)
상대편의 자극적인 발언이 반드시 해로운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자극에 ‘분기탱천’한 선수들이 분발해서 좋은 결과를 낳는 수도 많다. 그 것이 승부세계의 곁가지 속성이다.
이치로는 1회 대회 때 33타수 12안타( .364), 5타점을 기록했다. 1차리그에서 13타수 3안타( .231)로 무뎠던 그의 방망이가 하필이면 한국과의 준결승전에서 터져 5타수 3안타 1타점을 때려내며 팀 승리를 앞장서 이끌었다.
이치로의 2회 대회 1라운드의 3게임 성적은 14타수 4안타( .286)로 1회 대회 때와 마찬가지로 타율이 2할대로 그리 신통치 않았다. 다만 그가 기록한 4안타가 모두 한국전에서 때려냈다는(7일 3안타, 9일 1안타) 점이 마음에 걸린다. 7일에는 기습 번트를 시도, 한국을 약올리며 수비 교란을 꾀하기도 했다. 이 번트는 결과적으론 오히려 한국선수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자극제가 됐다.
이치로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치른 1회 대회 2차리그부터 결승까지 20타수 9안타(.450), 4타점을 올리며 맹활약했다. 일본 대표팀은 이번에도 이치로가 미국땅에서 일을 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지난 10일 미국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에 도착했던 일본 대표팀에서 이치로는 홀로 빠져나와 자택으로 돌아갔다. 1회 대회 때도 그랬듯이 일본 대표팀은 이치로를 특별 예우해 피닉스 인근의 자택에서 통근 훈련을 하도록 배려해 줬다.
이치로의 등번호는 51번이다. 원래 51번은 메이저리그 최고의 좌완투수로 군림했던 랜디 존슨(46.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이 시애틀에서 달고 있었다. 이치로가 2001년 일본에서 시애틀로 무대를 옮겼을 때는 랜디 존슨이 휴스턴을 거쳐 애리조나로 이적한 뒤였다. 그래서 이치로는 일본 시절부터 달고 있던 51번을 계속 쓸 수 있었다.
야구장 밖에서 본 평소의 이치로는 ‘티셔츠 한 장을 사더라도 오래 입을 수 있는 것을 고를’정도로 물건을 아주 소중히 여기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그 스스로가 꼽은 성격의 단점은 “타인에게도 엄하게 대하는 것”이라며 쓴 웃음을 지은 적이 있다. 그는 쓸 데 없이 지껄이는 것도 싫어한다.
이치로를 칭찬하는 것 가운데 한 가지는 그가 뜻밖에도 ‘성공’이라는 말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애매한 표현인데다 타인을 밀어내고 자기자신이 올라 선 것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라고 그가 말했다. (이시다 유타가 지은 에서 발췌 인용)
이치로의 발언과 그의 특징적인 성격 부분을 간략하게 언급한 것은 그의 극복이 곧 한국 프로야구의 진화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 때문이다.
이치로는 일본 대표팀 타선의 점화역을 맡고 있다. 이번 대회 1라운드에서 이치로는 줄곧 1번타자로 기용됐다. 한국과 일본이 2라운드 첫 판에서 나란히 승리를 거둘 경우 이번 대회 3번째 한-일 맞대결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될 경우, 이치로의 ‘그라운드 준동’을 막지 못하면 한국은 1회 대회 때처럼 일본에 어부지리를 내줄 수 있다. 이치로의 속속들이를 알고 대처한다면, 한국팀은 희망의 찬가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홍윤표 OSEN 대표기자
일본이 한국에 0-1로 영봉패한 다음 날인 3월10일, 일본 스포츠 신문들이 이치로의 “화가 난다”는 발언을 보도한 지면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