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33. 요미우리 자이언츠)이 가장 아끼는 물건은?
스크랩북이다. 이승엽은 그의 부친인 이춘광(66) 씨가 20여년간 자신의 신문기사를 빼놓지 않고 정리해놓은 스크랩북을 마치 분신처럼 여기면서 애지중지하고 있다. 그 스크랩북에는 이승엽 개인의 야구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분량이 작년까지 30권이 쌓였고, 올해 31권째를 열었다.
스크랩북을 만들게 된 계기는 이렇다. 1988년 대구 중앙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중이었던 이승엽이 그 해 팀이 전국대회 4강에 들었다. 이승엽은 투수 겸 4번타자로 뛰었고 어린이 홈런왕이 됐다. 6학년 2반(이승엽 부친의 기억) 동급생들이 이승엽의 기사가 실린 어린이 신문을 오려서 학급 게시판에 ‘우리들의 자랑, 우리 반의 야구왕 이승엽’이라는 제목을 달아서 붙여놓았다.
이춘광 씨가 그것을 보고 난 후 아들을 위해서 자료를 정리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 신문기사를 스크랩북에 차곡차곡 챙겨넣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 그 스크랩북은 이승엽의 소중한 자산이 됐다. 이승엽은 지난 2004년 일본에 진출한 이후 귀국하면 우선 자신의 스크랩북을 뒤져보는 일부터 시작한다.
“승엽이가 폼이 흐트러져 타격이 안좋을 때는 일부러 옛날 스크랩북을 뒤져 추억에 잠기거나 회상도 하고, 힘을 얻곤했다. 어떤 때는 아예 스크랩북 몇 권을 일본으로 가져가기도 한다”고 이춘광 씨는 전했다.
이승엽은 어렸을 적부터 자신의 야구 성적표를 스스로 작성하는 버릇도 있다. 투수로 출장했다면 이닝수와 탈삼진, 피안타, 사사구 등을, 타자로 나갔을 때라면 몇 타수, 몇 안타 이런 식으로 간략하게 매 경기마다 성적을 정리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습성은 자신의 마음을 다잡고 각오를 되새기는 긍정적인 효과를 낳았다.
이승엽은 이번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데 대해 틈만나면 미안한 마음을 표시했다. 지난 3월 24일 일본과의 결승전 때도 이승엽은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시범경기(도쿄 진구구장) 도중 수시로 구단 관계자로부터 경기 진행 상황을 전해들었다. 한국이 졌다는 사실은 6회 공격 도중 스탠드의 일본 관중들의 함성을 듣고 감지했다.
내심 충격을 받았을 법했지만 이승엽은 그 직후 타석에 들어서 시범경기 6호째 2점홈런을 날렸다. 상대투수 기다 마사오(41)의 바깥쪽으로 빠지는 높은 직구에 방망이를 제대로 맞춰 타구속도가 줄지 않고 그대로 왼쪽 담장을 넘어가는 홈런이 됐다. 한창 잘 맞을 때를 연상시키는 교타였다(일본 은 이 장면을 두고 ‘부활을 예감케하는 일격’이라고 표현했다).
이승엽은 그 경기 직후 일본 언론에 “부상도 없고 상태도 좋았지만 한국대표팀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죄송한 마음이다”고 고개를 조아렸다. 이승엽은 그러나 “이런 상태를 개막까지 유지하고 싶다. 개막전이 빨리 됐으면 좋겠다”고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승엽은 26일 현재 시범경기 8홈런으로 12개구단 타자들 가운데 최다홈런을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24년만에 하라 다쓰노리 요미우리 감독의 기록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조짐이 좋다. WBC 대표팀도 애써 사양하고 부활에 온 힘을 기울인 댓가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승엽은 작년까지 일본 무대 5년간 통산 123홈런을 날렸다. 150홈런 이정표에 27개를 남겨놓고 있다. 1995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한 이후 이승엽이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지 못한 것은 1996년(9개) 이후 작년(8개)이 두 번째였다. ‘아시아의 홈런왕’이승엽으로선 수치스럽게 여길만하다.
지난 해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이승엽이 올해 순조롭게 부활의 나래를 편다면, 50홈런 달성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2003년 6월 22일, 이승엽은 대구구장에서 열렸던 SK 와이번스전에서 세계 최연소(만 26세 10개월 4일) 개인통산 300호 홈런을 쏘아올렸다. 그 날, 이승엽은 300호(시즌 32호) 홈런에 이어 4-4 동점이었던 9회 말 2사 만루에서 극적인 끝내기 만루홈런을 301호로 장식했다. 야구선수가 평생가도 한 번 맛볼까 말까한 ‘끝내기 만루홈런’의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이승엽은 아쉽게도 2004년 일본에 진출한 이후에는 단 한 방의 만루홈런도 쳐내지 못했다. 총 123개(2004년 14, 2005년 30, 2006년 41, 2007년 30개, 2008년 8개) 가운데 만루홈런이 없다는 점 때문에 일부에서는 영양가 논쟁의 꼬투리로 삼고 있기도 하다.
이승엽은 삼성 라이온즈 시절 9년간 개인통산 324홈런을 날렸고 그 중 만루홈런이 8개였다. 만루홈런은 일단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희귀할 수밖에 없는 홈런이다. 반드시 주자 만루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서야하기 때문이다.
반면 이병규(34. 주니치 드래건스)는 운좋게도 2007년 9월 4일 나고야 돔에서 열린 요미우리전에 중견수 겸 6번 타자로 선발 출장해 일본 무대 진출 후 첫 만루홈런을 장식하며 팀의 7-3 승리를 이끈 바 있다.
올해야말로 이승엽이 홈런의 백미인 만루홈런을 때려내는 것을 보고 싶다. 덧붙여, 이승엽이 50홈런 이상 때려냈으면 좋겠다. 이승엽은 1999년(54개)과 2003년(56개. 아시아신기록)에 50홈런 이상 기록했다. 일본에서는 2006년에 기록한 41개가 자신의 한 시즌 최다였다. 참고로 일본 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홈런은 55개(1964년 오사다하루, 2001년 로즈, 2002년 카브레라 등 3명)이고 연간 50홈런 이상 기록한 것은 센트럴, 퍼시픽 양리그 통틀어 모두 11차례였다.
이승엽은 2006년 지바롯데 마린스에서 요미우리로 이적한 후 2년 연속 개막전 홈런을 기록했다. 이승엽은 2006년 3월31일 도쿄돔 개막전(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쐐기포, 2007년 3월 30일 요코하마 구장에서 열렸던 요코하마와의 개막전에서도 동점홈런을 날린 바 있다. 그러나 2008년에는 개막전(야쿠르트 스왈로즈) 홈런을 기록하지 못했다.
일본프로야구는 4월3일에 일제히 시즌을 연다. 요미우리는 히로시마 카프와 도쿄돔에서 개막전을 갖는다. 이승엽은 시범경기 맹활약으로 개막전 1루수 겸 5번타자로 사실상 낙점받은 상태이다.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일본 프로야구 무대에서 이승엽이 올해 펄펄나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홍윤표 OSEN 대표기자
지난 3월 3일 도쿄돔에서 한국 대표팀이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연습경기를 갖기에 앞서 이승엽이 김인식 감독과 코치진을 찾아와 인사를 하고 있는 모습. /도쿄=김영민 기자ajyoung@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