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33. 요미우리 자이언츠)이 가는 길에 어두운 구름은 다 걷혔는가.
승부의 세계는 세상살이와 마찬가지로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렵다. 예기치못한 부상과 한결같지 않은 몸상태 등이 복잡다기한 주변의 상황과 맞물려 툭하면 변덕을 부리는 것이 승부세계의 두 얼굴이다. ‘국민타자’의 칭송을 들으며 2004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이승엽 또한 결코 순탄치 않은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2004, 2005년 지바롯데 마린스를 거쳐 2006년 요미우리로 옮겨 제 70대 요미우리 4번타자로 각광을 받을 때만해도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가 놓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손가락 부상에 시달리면서 급기야 2008년에는 8홈런에 그쳤다. 11년 연속 이어오던 두 자릿수 홈런 기록도 중단됐다.
이승엽은 올 시즌 부활을 다짐하며 제 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국대표팀도 마다하고 재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시범경기에서는 8홈런을 날리며 기대감을 부풀렸다. 정작 시즌에 들어가서는 하라 다쓰노리 감독의 ‘플래툰시시템’의 족쇄에 걸렸다. 상대팀 선발이 왼손투수이면 아예 이승엽을 선발 타순에서 배제해버리는 바람에 타격감 회복에 더욱 애를 먹었다. 이는 물론 이승엽이 5번 타순에 배치돼 출발한 시즌 초반에 부진한 타격을 보인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이승엽은 2004년에 마린스의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플래툰 시스템의 족쇄를 풀고 2005년에 도약한 경험이 있다. 하라 감독의 불신은 지나친 감이 있었지만, 이번에도 이승엽은 일단 그 벽을 깨트렸다. 5월 12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전부터 6번에서 5번 타순으로 한 단계 전진, 그 날 3안타를 날리며 성공적인 5번타순 복귀전을 치렀다. 13일 경기에서 무안타로 침묵했던 이승엽은 14일에는 2안타를 때려내며 팀 승리에 기여했다.
이승엽은 여전히 일본무대 최고 연봉(6억 엔. 추정)선수이다. 그러다보니 상대 투수들은 이승엽이 타석에만 들어서면 눈에 불을켜고 던진다. 다른 외국인 타자들과는 달리 유난히 이승엽의 타석에서 이를 악물고 전력투구하는 일본인 투수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이승엽은 완연한 회복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12일 5번 타순 복귀전에서 보여주었 듯이 왼손투수에게 주눅들지 않고, 까다로운 구질에도 부드러운 손목놀림으로 안타를 만들어냈다(14일 요코하마전)는 점이다.
요미우리 출신으로 현재 의 야구해설자인 나카하타 키요시는 지난 8일 경기를 지켜본 다음 이승엽에 대해 아주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승엽은 직구에 대한 불안감을 없앴다. 3번째 안타는 슬라이더를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고 오른손만으로 우전안타를 만들어냈다. 이승엽은 올 시즌에 직구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시동이 항상 늦었다. 타자로서는 가장 불안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7일 요코하마전에서 잇달아 직구를 공략해 연타석 홈런을 기록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직구 타이밍을 살려 변화구에 대처하는 것이 본래의 타격이다. 이승엽은 이제 그 모습을 찾았다.”
일본 최고 명문구단 요미우리의 4번타자를 지낸 이승엽으로선 5번타자 복귀가 단순한 클린업 트리오에 편입되는 의미를 넘어서 명예 회복의 단초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요미우리 구단으로서도 이승엽의 5번 복귀는 1번 사카모토 2번 마쓰모토, 3번 오가사와라, 4번 라미레스로 이어지는 이상적인 타선의 구축한다는 뜻이 있다. 이승엽으로선 5번 타순이 낯설지 않다. 지난 해 라미레스에게 4번 자리를 내주었던 이승엽은 5번은 물론 6번, 7번 타순까지 경험했다.
올 시즌에는 5번 타순으로 출발, 불과 4게임을 치른 다음 6번으로 강등됐다가(4월 8일) 한 달 남짓만에 5번 타순 복귀와 함께 붙박이 1번으로 제 자리를 찾았다.
요미우리에서 5번 타순이 주는 중압감은 적지 않다. 이승엽이 6번으로 내려간 후 5번 타순에 주로 기용됐던 가메이 요시유키(27)는 최근 NHK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5번 타순은 중압감이 심하다. 3번 오가사와라와 4번 라미레스가 타격이 좋은 선수들이어서 5번타순에서 타점을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여느 팀도 마찬가지겠지만, 요미우리 5번타자는 특히 출루율이 좋고 장타력이 있는 3, 4번 타자들을 홈으로 불러들여야하는 중책을 맡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승엽이 붙박이 5번타자로 올 시즌을 보내려면, 적시타를 쳐내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한다.
그동안 타율이 ‘멘도사라인(타율 2할1푼5리 언저리)’에서 허덕였던 이승엽은 최근 타격 호조로 2할8푼대(93타수 26안타)로 치솟았다. 타격 순위도 센트럴리그 18위(5월 14일 현재)로 수직 상승했다. 그렇지만 아직도 득점권 타율은 2할4푼1리로 라미레스( .429), 오가사와라( .394) 사카모토( .313), 가메이( .261) 등 요미우리 중심타자들에 비해 많이 낮다.
이승엽이 명실상부한 요미우리 5번타자로 거듭나려면, 나아가 4번 타자 자리를 되찾으려면 득점권 타율을 높이는 게 시급한 과제이다.
일본 프로야구는 오는 22일부터 퍼시픽리그와의 교류전에 들어간다. 2005년(12개)과 2006년(16개) 2년 연속 교류전 홈런왕에 빛났던 이승엽으로선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교류전에서 이승엽이 어떻게 활약하느냐에 따라 그의 위상도 변화가 올 것이다.
홍윤표 OSEN 대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