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 트레이드 1호 선수는 서정환(54) 전 삼성, KIA 감독이었다.
프로야구 출범 원년인 1982년 12월 7일, 한해가 저물 무렵에 서정환이 삼성에서 해태로 이적했다. 당시만하더라도 트레이드에 대한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어서 서정환의 트레이드는 당사자가 요청해서 이루어졌다. 서정환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삼성 라이온즈 서영무 감독(작고)에게 다른 팀에 보내달라고 졸라서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으로 갈아 입게 된다.
“그 때는 시즌이 끝나고 두 달 가량 경북 지역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각급학교에서 기술교육이나 사인회를 활발하게 전개했다. 포항으로 갈 때 서영무 감독 차에 일부러 동승해서 ‘감독님 좀, 풀어주십시요. 다른 데 가서 자리만 있으면 해낼 수 있습니다’고 하자 서 감독은 처음에는 ‘안된다. 여기서 끝내야 한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다시 ‘어디가든지 옮겨서 성공하고 싶다’고 간청하자 그제서야 ‘그렇다면 네가 알아서 가라’고 허락해 주셨다.
그 다음날 바로 서울로 올라가 삼미 관계자에 이어 해태 구단 이상국 과장(전 해태 단장, 전 KBO 사무총장)을 김일권과 함께 만났다. 그리고 해태로 가게 됐다.” 서정환은 삼성에서 오대석에게 눌렸다. 이를테면 유격수 2진으로 땜질용 선수로 지냈다. 이렇게 가다가는 선수생활의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그대로 스러질 것같은 위기감을 그는 느꼈던 것이다.
해태가 최종 행선지가 된 것은 그 팀에 김일권을 비롯 김봉연, 차영화, 신태중 등 친한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영호남 지역감정 대립이 심할 때였지만 운동 선수들은 그다지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서정환은 곧바로 해태 주전 유격수로 자리를 잡고 이적 첫 해였던 1983년에 한국시리즈 정상에 섰고 그 후에도 1989년까지 7년 동안 뛰면서 4차례(1986~1989년 4연패)나 더 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해태는 초창기 김봉연, 김성한, 김일권, 김준환, 김종모 등 당대를 휘어잡은 걸출한 타자들이 강렬한 타선을 이루고 있었다. 서정환은 내야 수비의 핵으로 안전망을 구축하고 팀 우승을 일궈냈다. KIA(전신 해태 시절 포함) 구단에는 유난히 트레이드 성공 사례가 많다. 초창기에는 서정환에 이어 한대화(49. 현 삼성 코치. 1986년 OB→해태)가 해태에서 선수 인생의 꽃을 활짝 피웠고, 2000년대 들어서는 김원섭(31. 2003년 두산→KIA), 이용규(24. 2005년 LG→KIA)와 이어 올해 LG에서 KIA로 말을 갈아탄 김상현(29)이 가장 최근의 사례이다.
한국 프로야구사에서 최고의 트레이드 성공 신화를 만들어냈던 한대화의 경우에는 트레이드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곡절을 겪었다. 한대화는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결승에서 극적인 역전 결승 3점홈런으로 일본을 침몰 시키고 한국이 첫 우승을 일궈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면서 일약 유명 선수로 우뚝 섰다.
한대화는 동국대를 졸업하고 1983년에 OB 베어스(두산 전신)에 입단했으나 이렇다할 활약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5년 11월 23일에 해태의 양승호, 황기선과 2:1 트레이드로 결정났으나 OB 구단과 불화를 빚고 있었던 한대화는 고향인 대전(빙그레 연고)으로 가고 싶어해 이 트레이드에 불응했다. OB 구단은 한대화를 트레이드 거부를 이유로 임의탈퇴를 요청, KBO가 1986년 1월11일 공시해버렸다.
그 후 OB는 한대화를 설득, 공시 60일이 지난 3월22일 원소속구단 복귀절차를 거쳐 결국 해태로 이적시켰다. 해태로 둥지를 옮긴 한대화는 이적하자마자 펄펄 날아 그 해 16개의 승리타점으로 시즌 최다 기록을 세우며 3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마저 꿰찼다. 한대화는 그 후 1994년 LG로 이적할 때가지 해태에서 8년간 뛰면서 무려 6차례나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고 1986년부터 1991년까지 6년연속 골든글러브를 탔다.
가정이지만, 만약 올해 김상현이 LG에서 KIA로 트레이드되지 않았더라면, KIA가 강세를 보일 수 있었을까. 김상현의 경우 원래 2001년에 해태에 입단했다가 2002년 시즌 도중 LG로 이적한 다음 다시 친정팀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김상현의 이적은 LG가 FA 정성훈을 영입하면서 수비 포지션(3루)가 겹치는 바람에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측면도 있다. LG에서 붙박이 3루수로 제 위치를 지키지 못했던 김상현은 KIA로 이적 한 후 6월 18일 현재 팀내 타점(48개) 1위(전체 공동 4위)로 공을 세웠다.
유독 KIA(해태) 구단에서 트레이드 성공 사례가 많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 점에 대해 서정환은 “해태는 선수들 간에 끈끈한 연대감이 강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그런 좋은 토양이 있기에 ‘씨앗’이 잘 큰 것”이라고 설명했다. “잠재력과 기량을 갖춘 선수가 제 자리를 찾아 꽃을 피운 것이다. 어느 선수가 와서 우승을 일궈낸 것이 아니라 해태라는 팀이 있어서 꽃을 피운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김상현의 트레이드를 주도했던 윤기두 KIA 운영팀장은 “트레이드는 두 구단간에 필요성이 맞아 떨어져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트레이드 성공 여부를 언급하는 것은 상대팀이 있기에 조심스럽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미래를 보고 할 필요가 있다”면서 “무엇보다 그 선수가 팀과 궁합이 맞아야 한다”고 ‘궁합론’을 거론했다.
김상현의 경우 LG 시절 수석코치로 같이 지낸 적이 있던 황병일 KIA 타격코치를 만난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김상현을 잘 알고 있는 황 코치의 지도가 KIA에서 빠른 시일에 붙박이 3루수로 자리잡게한 한가지 요인이라는 것이다.
트레이드는 특히 주전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고 겉돌고 있는 선수들에게는 새로운 돌파구가 된다. 물론 이적 후 그 선수가 성공적인 연착륙을 할 수 있느냐는 전적으로 선수자신에게 달려 있다. 근년 들어 우리 프로야구판에는 이른바 대형 트레이드가 사라졌다. 이는 FA 제도 시행 후에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지만 구단들이 자칫 트레이드로 인해 손해를 입지 않을까 저어하는 것도 한 가지 요인이다.
트레이드 활성화는 야구판을 키우고 그늘에 가려 있던 선수를 살리는 지름길이다. 과감한 트레이드를 바라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홍윤표 OSEN 대표기자
<사진>(위로부터)서정환, 한대화, 김상현의 최근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