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최영균의 인사이더] 마이클 잭슨이 죽었다. 외국 음악 좀 들었다는 이들에게, 특히 1990년대에 20대를 보낸 이들에게 잭슨의 죽음은 록의 흐름을 바꾸었던 커트 코베인이나 힙합을 대중화시켰던 투팍의 죽음을 맞이했을 때와 느낌이 좀 다를 듯하다. 청춘의 절대적 상징이었던 코베인, 사회적 약자(아프로 아메리칸)의 강력한 대변인이었던 투팍이 죽었을 당시 20대들은 좌절감에서 오는 슬픔을 많이 느꼈던 것으로 기억된다.
코베인과 투팍은 불꽃 같은 삶 끝에 결국 요절했다. 이들이 음악과 치열한 삶을 통해 외쳤던 이상에 공감했던 20대들 중에는 이들의 죽음을 통해 현실에서 끝내 좌절하는 희망을 목도하고 자신의 일처럼 아파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잭슨의 죽음은 좀 다르다. 우선 그의 죽음에는 반응하는 이들의 연령대가 훨씬 폭넓고 팬층도 다양하다 보니 대개의 대중들에게 있어 그의 죽음은 그의 위대함에 대한 경의를 표시하고 히트곡과 자신의 추억을 연결 지어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대해 상실감을 느껴 보는 기회를 갖는 반응들이 주를 이루는 듯하다. 물론 절대적인 슬픔을 느끼고 있는 골수팬들도 있지만 말이다.
잭슨은 그만큼 대중들에게 친밀했던 가수다. 그래서 죽음 이후 그를 되돌아 보는 글이나 기사에는 유독 ‘숫자’로 정리된 그의 위대함이 많이 등장한다. 음반 판매량의 각종 기록들, 1위곡 수, 벌어들인 돈…. 대중들이 가장 이해하기 편한, ‘수치 상으로 잭슨이 이렇듯 뭐든지 최고이니 위대하다’는 식의 설명이 이어지고 있다.
맞다. 잭슨은 ‘숫자’ 상으로 최고의 가수였다. 하지만 여기서 설명을 접으면 그의 위대함을 축소, 왜곡하는 일이다. 음반 판매량이나 벌어들인 돈으로만 계산하면 잭슨에 육박하는 가수들도 꽤 있다. 그러나 그들과 잭슨을 같은 반열에 놓고 말할 수는 없다.
잭슨은 음반도 많이 팔면서 팝음악의 큰 틀을 완전히 새로 만들어낸, 가수 이상의 ‘문화 창조자’였기 때문이다.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가장 혁신적이었던 잭슨의 ‘팝송 월드’는 30년 가까이 아직도 많은 부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대체자가 나오지 못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던 그는 홀연히 세상 너머로 돌아가버렸다.
잭슨이 등장하면서 팝은 그가 이끄는 네 가지 방향으로 이끌려 갔다. ‘뮤직비디오’, ‘비주얼 퍼포먼스’, ‘춤’, 그리고 ‘사운드’다. 우선 잭슨은 ‘Thriller’ 앨범을 통해 막 출범한 MTV가, 그리고 ‘뮤직비디오’가 가수 활동의 중추가 되도록 만들었다. 영화에 필적하는 제작 규모와 아이디어의 뮤비로 당시까지 라디오 우선이었던 대중들의 관심을 TV속 음악으로 끌어 들였다.
‘비주얼 퍼포먼스’는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춤과 이벤트로 공연을 듣기만 하는 것에서 듣고 보는 것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춤’은 ‘잭슨 이후 모든 춤이 그의 품 안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평을 하는 댄서들이 많을 정도로 잭슨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3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잭슨이 시작한 브레이크 댄스의 자장 안에 미국의 어셔든, 한국의 비든 포함돼 있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사운드’. 잭슨은 단순히 대중적인 멜로디만 잘 만들어내는 가수가 아니었다. 그의 새 음반은 늘 새로운 사운드의 보고였다. 그리고 그 사운드들은 몇 년이 지났건 지금까지도 세련됨을 잃지 않고 여전히 미국에서, 한국에서, 세계 곳곳에서 차용되고 있다. 잭슨이 중시한 사운드의 혁신은 현재 팝음악의 조류인 ‘프로듀서의 시대’가 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잭슨은 사실인지 여전히 확인하기 힘든, 성형이나 아동 학대, 기타 각종 기행 스캔들로 인해 죽기 전 많은 날들을 숨죽여 지냈다. 그리고 그런 그를 타블로이드들은 수없이 희화화했고 대중들은 그를 의심하거나 가볍게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CD를, 뮤비를 플레이어에 거는 순간, 공연장에서 ‘토스트’하면서 공연을 시작하는 순간 잭슨은 언제나 절대적인 권위를 풍기는 ‘팝의 제왕’이었다. 이제 그의 영면으로 더 이상 희화화되지 않을 잭슨에게는 영원히 존경 받고 사랑 받을 음악 많이 남게 됐다.
/대중문화가이드 ck1@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