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호의 인사이드 베이스볼]‘10년 투병’ 임수혁, 그냥 두고만 볼 것인가
OSEN 기자
발행 2009.12.14 09: 48

12월 10일에 열렸던 ‘2009 스포츠 토토 올해의 상’ 시상식에서 선행상을 대표로 수상한 히어로즈 송지만은 “임수혁 선수에 대한 기억들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소감을 밝혀 듣는 이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10년 째 임수혁 돕기를 해온 히어로즈 선수 상조회는 이번 상금도 임수혁 측에 전달한다. 올해도 시즌이 끝난 후 따뜻한 마음이 담긴 행사들이 올해도 어김없이 열렸다. ‘임수혁 돕기 일일 고깃집 행사’, ‘임수혁 선수 및 불우 이웃 돕기’등이 이어졌다. 그를 사랑하는 선수들과 팬들의 정성이 담긴 행사들이다. 임수혁을 병상에 남겨 놓은 채 세월은 무심하게도 빨리 흘러가고 있다. 내년 시즌 개막 초기인 2010년 4월 18일이면 그가 그라운드에서 쓰러진 후 정확하게 10년이 된다. 임수혁은 2000년 4월18일 LG 트윈스와의 잠실 경기에서 2루로 뛰다 쓰러진 이후 10년째 의식 불명 상태이다. 1969년 생인 전 롯데 포수 임수혁은 올해 만 40세가 됐고 내년에는 41세가 된다. 그러나 병세는 전혀 차도를 보이지 않아 가족은 물론 지켜보는 모든 분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1994년 롯데에서 데뷔한 그는 통산 47홈런, 257타점에 타율 2할6푼6리를 기록한 공격형 포수였다. 한국프로야구는 2009시즌 592만 명으로 역대 한 시즌 최다 관중 신기록을 세웠다. 며칠 전 서울의 모 대형 서점에 들렀는데 야구 관련 서적들이 작은 코너로 만들어져 있었다. 리틀 야구, 동호인 팀들의 급증과 함께 야구 서적이 팔릴 만큼 야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있다는 것을 바닥에서부터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돔 구장 건설도 본격 추진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KPBPA)가 노조 전환을 결의하고 구단과 갈등을 빚는 와중이다. 그러나 한국프로야구사에는 임수혁의 비극적인 사고로 여전히 짙은 어둠을 드리우고 있다. 필자는 2008년 3월에 이어 두 번째로 임수혁을 위한 자선 경기를 2010년 4월 18일 열자고 제안한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가족 팬들이 야구장 나들이를 하기에 좋다. 지난 시즌에도 4월 18일부터 펼쳐진 히어로즈와 롯데의 3연전을 ‘임수혁 데이’로 선정하고 그를 돕기 위한 경기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2의 도약기를 시작한 한국프로야구 전체의 관심과 성원이 하나로 모인 게임을 해보자는 것이다. 현재 야구 경기 역사상 한 게임 최다 관중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것은 11만 5300명이다. 2008년 3월 29일 LA의 메모리얼 콜로시움에서 열린 기념 경기에서 작성됐다. LA 다저스는 연고지 이전 50주년을 기념해 전년도 월드시리즈 챔피언 보스턴 레드삭스와 시범 경기를 가졌다. 당시 LA 다저스는 9만 505석의 예매표가 순식간에 매진되자 팬들의 요청으로 입석까지 2만 5000석을 증설해 수용 규모를 11만 5000명으로 늘렸다. 이 게임의 목적은 LA 다저스가 펼치는 암 연구를 위한 자선 사업인 ‘싱크큐어(ThinkCure)’기금 마련이었다. LA 다저스는 게임의 수익금과 상관없이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그 경기에 스프링캠프 초청선수로 LA 다저스에 복귀해 재기에 나선 박찬호가 팀의 두 번째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2 ⅔이닝 동안 2실점했다. 승패에 의미가 없는 경기였음을 고려하면 박찬호는 야구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경기에 마운드에 오른 행운을 가진 것이다. 11만 관중 앞에서 야구장도 아닌 풋볼 경기장을 개조한 구장에서 던지는 경험을 과연 몇 명이나 가졌겠는가? 박찬호는 임수혁 돕기 경매 행사가 열렸을 때 친필 사인을 담은 글러브와 볼, 배트를 내놓기도 했다. 필자도 당시 메모리얼 콜로시움움현장에서 취재를 했는데 경기 후 주차를 해놓은 다저스타디움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길거리를 헤매는 등 2시간이 넘게 소요됐던 기억이 생생하다. 워낙 많은 관중이 모이게 되자 LA 다저스는 다저스타디움-콜로시엄을 오가는 버스까지 운행했다. 그 경기 전 메이저리그 역사상 한 경기 최다 관중을 기록한 게임은 1959년 5월 7일 같은 장소인 LA의 메모리얼 콜로시움에서 열린 LA 다저스-뉴욕 양키스의 시범 경기로 9만 3103명이 운집했다. 당시 왜 월드시리즈 우승팀인 뉴욕 양키스가 기꺼이 다저스와의 시범 경기에 나섰고 엄청난 팬들이 구장을 찾았을까? 게임의 개최 취지가 그 1년 전 교통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 된 전 브루클린 다저스 포수 로이 캄파넬라를 돕기 위한 자선 기금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행사의 명칭은 ‘로이 캄파넬라의 밤(Roy Campanella Night)’이었다. 다저스타디움 기자실 뒤 식당에 가면 휠체어에 앉은 로이 캄파넬라의 사진이 붙어 있다. 바로 그날 촬영한 것이다. 그러나 ‘임수혁의 밤’과 ‘로이 캄파넬라의 밤’은 같은 ‘밤(Night)’이어도 한국프로야구와 메이저리그만큼이나 수준 차이가 나는 모양이다. 로이 캄파넬라는 1948년 브루클린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흑인 포수이다. 1957년까지 활약하며 1949~1956시즌 올스타, 1951, 1953, 1955시즌 내셔널리그 MVP를 차지한 공격형 포수의 대명사였다. 142타점과 함께 1953년 기록한 40홈런은 메이저리그 포수 한 시즌 최다 자리를 오랜 동안 지키다가 1999년에야 스테로이드로 무장한 토드 헌들리에 의해 깨졌다. 그러나 로이 캄파넬라는 1957년 시즌 후 LA로 연고지를 옮긴 다저스의 임시 홈구장이었던 메모리얼 콜로시움의 그라운드를 선수로서는 끝내 밟아보지 못하고 말았다. 롱 아일랜드에 살던 그는 할렘에서 주류 가게(liquor shop)를 부업으로 하고 있었는데 1958년 1월28일 밤 가게 문을 닫고 귀가하던 중 운전하던 차가 얼음에 미끄러져 전신주를 들이 받고 전복됐다. 이 사고로 가슴 이하가 마비되는 후유 장애가 발생해 남은 인생을 휠체어에 의지하게 됐다. 브루클린을 떠난 다저스는 불의의 사고로 LA에 함께 오지 못한 로이 캄파넬라를 위한 자선 경기를 열었던 것이다. 한국프로야구는 아직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크게 성장을 했고, 프로야구로 부를 쌓은 지도자와 선수들도 많아졌다. 그러나 자선에 대한 관심도는 프로 야구인들의 위상에 걸맞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임수혁에 대한 기억과 관련해 필자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선수는 구대성이었다. 일본에서 활약할 당시 구대성은 느닷없이 한화 구단에 전화를 걸어 ‘2000만 원을 임수혁 가족에게 전달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를 도와준 당시 한화 구단 관계자는 ‘모두가 놀랐다. 외부에 알리지 말라며 그냥 무조건 내 말대로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바로 구단에 그 돈을 송금해줬다’고 떠올렸다. 말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행동으로 한 것이다. /전 일간스포츠 편집국장, MLB 특파원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의 임수혁 돕기 일일호프 행사 모습(제공=롯데 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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