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은 9단(27)이 2월1~4일 중국 광저우 웨스틴 호텔에서 열린 제8회 정관장배 세계여자바둑 최강전에서 한국 팀 마지막 주자로 나서 재중동포이면서 중국 팀 대표로 출전한 송용혜 5단(18)과 일본팀 최종 주자 스즈키 아유미 5단(27)을 격파, 2연승으로 숨을 고른 후, 기다리고 있던 중국의 여성 중견 강호 예꾸이 5단(36)과 최강 신예 리허 2단(18)까지 모두 물리쳐 4연승, 한국 팀에 우승컵을 안겼다. 지난 5회 대회 때 이민진 5단(26)의 기적 같은 막판 5연승 우승 이후 두 번째로 맛보는 짜릿한 대역전 드라마였다. 박 9단이 이겨 한국 우승이 확정된 순간 인터넷 바둑 사이트에는 “박지은이 이번에 여러 사람을 살렸다”는 댓글이 여러 편 올라왔고, 바둑 팬들은 그를 보며 웃었다. 참 좋은 세상, 아니 정말 빠른 세상이다. 이번 광저우 회전에는 본 대회 말고 이벤트 대국이란 게 또 있었다. 박 9단 외에 조혜연 8단(25), 루이나이웨이 9단(47), 중국의 신예 탕이 2단(22), 네 명이 토너먼트를 벌여 루이가 조혜연을 이기고 탕이가 박지은을 이긴 다음 탕이가 루이를 꺾고 우승 상금 1000만 원을 차지한 건데, 이 게 구설수에 올랐다. 우선 대국 일정이 상식 이하였다. 조혜연과 루이, 탕이는 정관장배 출전 선수가 아니었으니 2월1~4일 중 아무 때나 둘 수 있었다. 문제는 박지은이었다. 박지은은 나흘 연속 대국이었는데, 2월3일에는, 낮 2시부터는 정관장배 바둑, 저녁 7시부터는 이벤트 바둑을 두는 그런 스케줄이었다. 제한시간 각자 1시간인 준속기이긴 하지만, 초읽기까지 가다보면 서너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한 시간도 쉬지 못 하고 바로 이벤트 바둑을 두어야 했던 것이다. 프로 공식 대국에 하루에 두 판이란 건 없다. 프로는 공식 대국 한 판에 모든 걸 쏟아 붓는다. 그 날 하루는 그 한 판에 바치는 것이다. TV속기 전, 결승 3번 기일 경우 2-3국을 하루에 둔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건 아주 예외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하루에 두 판을 두더라도 중간에 휴식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게다가 이번 경우는 3일 낮 대국에서 박지은이 이기면 다음 날 결승이었다. 국제대회 결승 전 날, 이벤트 바둑 한 판을 더 두라는 것은 상식 이하, 아니 누구 말마따나 변명의 여지가 없는 몰상식의 극치였다. 보나마나 이래서였을 것이다. 대회 일정은 나흘을 잡아 놓았다. 그런데 송용혜가 박지은과 스즈키를 다 이겨 버리면 이틀 만에 끝날 수도 있다. 그러니 나머지 이틀을 채우기 위해 이벤트를 하나 만들자. 그것까지는 그럴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틀 만에 끝나고 나서도 이벤트는 만들 수 있었다. 일정에 상관없이 이벤트가 꼭 필요했다면 박지은의 4연승 후 일정을 연장해야 했다. 이래서 정관장배는 이번에 돈은 돈 대로 쓰고 욕은 욕대로 먹는 수모를 당했다. 예산 5억6000만 원에 우승 팀 상금 7500만 원이 작은가. 박지은이 만약 결승에서 졌다면 정관장은 초상집이 되었을 것이다. 그 걸 박지은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여러 사람을 살려 주었다. 비록 이벤트 바둑은 졌지만. 루이가 이벤트 멤버로 된 것도 조금은 그렇다. 이벤트에 한국 두 사람, 중국 두 사람을 출전시킨 것도 그렇다. 루이는 소속이 애매한 기사다. 중국인이면서 소속은 한국기원이다. 정관장배가 표방하는 것은 국가대항전. 그렇다면 루이는 중국 대표로 나와야 하는데, 루이는 자신의 모국 중국과 아직도 관계가 껄끄럽다. 루이-장주주 9단(48) 부부가 중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한국으로, 바둑 집시로 전전한 것은 톈안먼(天安門) 사태라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었지만, 그에 대해서는 부부 자신이 “그 게 아니라”고 부인한 바도 있거니와, 사실은 중국 바둑계의 권력 녜웨이핑 9단(58)과 사이가 안 좋아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하는 얘기다. 루이는 여전히 여자 프로바둑에서는 세계 정상급이다. 요즘은 최강이라고는 잘라 말하기 어렵지만, 정상 가운데 한 사람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 루이를 정정당당하게 국제대회에 출전시키고자 한다면, 그러면서 중국이 의식된다면 정관장배를 ‘국가대항전’이 아니라 ‘기원 대항전’으로 바꾸어 ‘한국기원 대표’로 하면 된다. 그러나 그건 아무래도 어색하다. 그러니 중국을 의식할 필요 없이 주최-후원 측의 의사대로 하면 된다. 왜 중국을 의식하는가. 이 점에서는 루이 부부가 의사를 밝히는 것도 바람직하다. 일본이 받아주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 차민수 4단의 노력으로 2000년부터 한국기원 소속으로 활동을 시작해 이제 10년이 되었고 그동안 누릴 만큼 누렸으니 이제는 루이 부부도 떳떳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밝힐 때도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이벤트는 참가자 네 명을 바둑 팬들의 인터넷 인기투표로 정했다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정관장배에 출전하지 않은 선수들을 등장시킬 것이 아니라 정관장배에 출전한 선수들, 그리고 한-중 대결이 아니라 중국을 하나로 줄이고 대신 일본 선수 하나를 끼워 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 게 대회 취지를 더욱 살리는 이벤트 아니었을까. 그나저나 박지은은 세계무대에서는 이토록 잘 두면서 국내에서는 왜 루이로 하여금 한국 여자 프로바둑의 본격 타이틀 세 개, ‘여류 국수’ ‘여류 명인’ ‘여류 기성’, 이 3개를 독점하게 만드는지 불가사의하다. 그런 점에서는 조혜연도 마찬가지. 조혜연은 박지은과 쌍벽이고, 루이하고도 호각의 승부를 펼치는데, 종교 때문에 중요 대국을 포기하고 있다. 조혜연은 교회에 다닌다. 조혜연이 중요 대국을 포기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주일 성수(聖守, 1주일에 일요일, 즉 주일에는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일이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성스럽게 지키는 것)’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혜연 교회의 목사님이나 어른들이 당연히 조혜연을 대회에 나가도록 설득해야 한다. 박지은과 조혜연은 좋은 라이벌인데 아직도 루이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 하고 있다. 언제 적 루이인가. 바둑황제 조훈현 9단(57)도 요즘은 새카만 후배들에게 뻥뻥 나가떨어지곤 하는데. 거듭 말하지만 박지은이 큰일을 했다. 정관장배 이벤트와 그 스케줄은 도대체 누구 아이디어일까. 설마 한국기원은 아니겠지. 요즘 한국 바둑은 두 가지에 빠져드는 것 같다. 이벤트를 너무 좋아한다. 그리고 중국 편향이다. 둘 다 바람직하지도 않고 위험한 현상이다. 이벤트에 대해선 다음에 다시 BC카드배를 거론할 생각이다. 일본도 물론 그렇지만, 중국도, 우리가 의식해야 할 상대가 아니라 극복해야 할 이웃이다. 원교근공이란 것도 있는데 말이다. 전 월간 바둑 편집장, 현 일요신문 해설위원 제8회 정관장배 세계여자바둑대회에서 막판 4연승으로 한국팀 우승을 이끈 박지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