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까지 2시간대를 유지하던 경기당 평균 소요시간이 늘고 늘어 어느덧 3시간 30분선까지 육박해가고 있는 현실을 프로야구의 중차대한 위기라 인식하고, 좀더 박진감과 생동감을 불어넣고자 다각도로 경기를 스피드 업 시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가장 주목을 끌었던 부분은 단연 ‘12초룰’이었다.(주자가 없을 때 투수가 타자에게 공을 던지는 투구시도 행위를 12초 이내에 시작해야 한다는 규정으로서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12초 이내 투구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반할 경우 처음에는 ‘경고’가 주어지고 두 번째 이후부터는‘볼’이 선언된다)
이 12초룰은 그간 이미 야구규칙서에도 명문화 되어있는 하나의 경기규칙이었으면서도 수 년 전(2004년) 반짝한 이후로는 알게 모르게 경기장내에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가곤 하던 사실상 사(死)문화된 규칙이었다.
하지만 한 경기에 양 팀의 투수들이 던져대는 투구수 합계가 평균 250~300개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할 때, 공 한 개당 단 몇 초씩만 단축 하더라도 전체적인 경기시간이 10~20분 정도는 쉽게 줄어들 수 있겠다는 산술적인 계산이 우선적으로 부각되었고, 이 점이 ‘12초룰’을 다시 살리게 된 직접적인 이유였다.

아직은 정규시즌이 채 반환점도 돌지 않은 이른 시점이긴 하나, 지난해 평균 소요시간(9이닝 기준) 3시간 22분보다 무려 15분 이상 짧아진 3시간 5분대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 12초룰을 비롯, 올 시즌 채택한 여러 스피드 업 관련규정들이 어우러져 상당부분 약효를 내고 있다는 쪽으로의 해석이 가능하다 하겠다.
그런데 이 ‘12초룰’도 파고들면 다른 야구규칙들이 대체로 그렇듯, 투수가 제한된 시간 안에 공을 던지지 않으면 볼을 선언하면 그만인 단편적인 얼굴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3월 27일 열린 삼성과 LG전(대구)에서는 7회말 2사 후, 삼성 좌타자 최형우가 볼카운트 2-1에서 12초룰 위반을 지적당함과 동시에 투구동작에 들어간 오상민(LG)의 투구를 받아 쳐 중견수 플라이로 아웃 된 적이 있다.

눈을 감고 이 상황을 그려보면 최형우가 어딘지 모르게 손해라는 느낌부터 다가온다. 투수가 규칙위반을 지적 받았을 정도로 투구간격을 지나치게 길게 잡아 타자가 타이밍을 뺏긴 꼴인데, 그렇다면 타자 최형우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어떤 형태의 후속조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물음도 뒤를 따른다.
이런 까닭으로 12초룰과 관련되어 일어날 수 있는 가상의 상황에 맞는 여러별도 규정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직접적으로 경기진행을 맡는 심판원과 기록원(구단 기록원포함)들에게는 이미 주지가 된 사항이지만, 세부규정을 정확하게 알기 힘든 팬들을 위해 이 기회를 빌어 핵심내용을 설명하고 넘어가도록 한다.
먼저 어느 투수가 12초룰을 처음 위반해 경고가 주어지는 시점에서 앞서 최형우와 같은 예처럼 타격이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그 타격행위는 그대로 유효가 된다. 물론 플레이가 종료된 다음에는 경고가 정식으로 투수에게 주어진다.
만일 이미 한 차례 12초룰 위반을 지적당한 투수가 두 번째 위반으로 볼이 선언되는 길목에서 역시 최형우 때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고 한다면?
그 때의 최형우 아웃은 원천 무효이며 타석으로 돌아와 볼 카운트 2-2에서 재 타격을 실시한다.
그럼 최형우가 친 공이 안타가 되었다면?
그런 경우는 유효다. 타자가 안타, 4사구, 실책 등으로 1루에 살아나간 경우에는 타자의 플레이는 모두 유효로 일괄 처리된다.
이 대목에서는 질문이 하나 떠오를 것이다. 안타나 4사구는 타자기록에 있어 마이너스 요인이 아니기 때문에 괜찮아 보이는데, 실책으로 타자가 출루한 것은 타율상 타자에게 오히려 불리한 것이 아닐까라는 걱정 말이다.
왠지 불합리할 것 같은 이 규정도 찾아보면 다 근거가 있다. 타자가 포수의 타격방해에도 불구하고 타격을 시도한 결과, 안타, 4사구, 실책 등으로 1루에 출루하고 다른 루상의 주자들도 모두 1개루 이상씩 진루했다면 방해는 없던 것으로 되어 플레이는 계속된다(규칙 6.08).
규칙서를 뒤로 넘기면 위와 유사한 내용이 또 하나 나타난다. 투수가 보크를 선언 당했음에도 던진 투구를 타자가 쳤을 경우다. 역시 타자가 1루에 출루하고 다른 루상의 주자들이
1개루 이상 진루했다면 이미 선언된 보크와 관계없이 플레이는 계속된다(8.05).
2000년 4월, SK와 삼성전(인천) 3회초 1사 2루 상황에서 유격수(SK) 김호가 투수(권명철) 보크가 선언되었음에도 때려낸 삼성 훌리오 프랑코의 땅볼타구를 볼 데드로 알았는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자신 앞으로 굴러온 평범한 땅볼을 그대로 뒤로 흘려 보낸 일이 있었다.
2루주자는 득점, 타자주자는 2루까지 진루. 이때 타자의 기록은 유격수 실책이었다. 이는 타자가 포수의 방해나 투수의 규칙위반 플레이(보크, 12초 위반)로 인해 정상적인 타격이
불가능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타격행위 결과, 공격 측이 상대의 페널티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상황이상으로 유리한 국면을 얻었을 경우, 이를 그대로 인정하도록 하고 있는 공격측 어드밴티지 규칙에 근거를 둔 것이다.
물론 12초룰 위반과 동시에 타격행위를 마무리 지은 타자가 1개루 진루 후, 그 이상의 루를 노리다 아웃 된 경우는 예외다. 생존권을 보장받지 못한다.
예를 들면 장타성 타구를 친 타자가 2루에서 아웃 된 경우가 그렇다. 기록은 안타가 되겠지만 그대로 아웃이다. 단, 볼 카운트가 쓰리 볼 상태(0-3, 1-3, 2-3)에서 타자가 타격을 시도해 아웃 되었다면 재 타격시키지 않고 볼넷으로 출루한 것으로 인정한다. 어차피 볼이 선언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상이 12초룰에 숨어있는 규칙들이다. 일견 복잡해 보이지만 공격 측을 유리하게 한다는 원리를 이해하면 의외로 간단하게 습득할 수 있는 규칙들이다.
규칙은 아니지만 차제에 12초룰 재 시행에 담긴 속뜻도 확인하고 넘어가도록 한다. ‘12초룰’은 액면처럼 12초 이내에 공을 던지지 않는 투수를 벌 주기 위한 목적이 다가 아니다. 12초가 되었든 15초가 되었든 숫자로 나타난 제한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진정 의도한 바는 투수들의 불필요하다고 보여지는 군더더기 동작들을 과감히 버리게 만들고, 타자를 상대로 적극적인 승부를 펼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구위에 자신이 없는 나머지 지나치게 질질 시간을 끄는 신경전적인 방법으로 타자와의 타이밍 싸움에서 이기려 드는 지루한 야구, 재미없는 야구를 제거하기 위함이다.
정말로 박진감 있는 야구라면 그 평균시간이 설령 3시간 30분을 넘긴다 한들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한국프로야구가 추구하는 경기 스피드 업의 진정한 본질도 바로 이 안에 있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
<사진>오상민과 최형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