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시즌 진출을 위한 가능성 있는 팀들의 막판 질주가 한창인 가운데, 한 쪽에서는 정규리그 MVP의 주인공이 과연 누가 될 것인가를 놓고 벌이는 팬들의 설전이 4강 티켓다툼 못지 않게 무척이나 뜨거운 요즘이다.
2010 정규리그의 강력한 MVP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선수는 두 명으로 압축된다. 한화의 류현진과 롯데의 이대호, 한마디로 '괴물'로 불리는 거물급 선수 둘이다. 시간을 거슬러 과거 속 역대 MVP 후보들의 경쟁관계를 돌아봐도 올해처럼 그 저울추가 유난히 팽팽했던 때가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시즌 전 경기 Q.S(퀄리티 스타트) 유지, 단순한 투수부문 3관왕이 아니라 15년만의 좌완 20승, 12년만의 1점대 방어율, 역대 시즌 최다 탈삼진 기록(223K)경신을 꿈꾸는 동시에 정규이닝 최다 탈삼진(17K) 신기록과 23연속 Q.S(단일시즌 세계신기록)를 훈장 삼아 생애 두 번째 MVP 자리에 도전장을 내민 류현진.

역시 그저 그런 기록의 타자부문 3관왕이 아니라 7년만의 40홈런 시대 부활, 역대 시즌 최다 타점(144개) 기록 경신, 도루를 제외한 실질상의 타격 7개 부문(타율, 홈런, 타점, 득점, 최다안타, 장타율, 출루율) 독식을 꿈 꾸는 동시에 9연속 경기 홈런(세계신기록)과 16경기 연속 득점 신기록을 무기 삼아 이번만은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로 나선 MVP 재수생 이대호.
그 누가 MVP가 된다고 한들 전혀 이상할 것 없는 호성적들이다. 오히려 줄 수만 있다면 둘 다 주고 싶은 마음이다. 우리도 미국이나 일본처럼 ‘사이 영 상’이나 ‘사와무라 상’과 같이 투수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시상이 따로 있어 류현진을 주고, 타자인 이대호에게는 MVP를 수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류현진과 이대호의 MVP 경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06년 류현진이 신인으로서 전무후무한 신인왕과 MVP를 한꺼번에 가져가는 동시석권의 위업을 이룰 당시, 두 선수는 시즌 MVP 한 자리를 놓고 표 대결을 벌인 적이 있었다. 결과는 류현진의 12표차(47-35) 판정승.

2006년 이대호는 타율(.336), 홈런(26개), 타점(88개)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며 타격 3관왕에 올랐었다. 1984년 삼성 포수 이만수가 타격 3관왕에 오른 것을 끝으로 22년간 그 누구도 해낸 바 없었던 대업이었다. 하지만 이대호는 역시 다승(18승), 방어율(2.23), 탈삼진(204개)으로 대별되는 투수부문 3관왕을 싹쓸이한 19살의 풋내기 류현진에게 MVP를 넘겨주어야 했다.
성적만 놓고 봐서는 류현진에게 그다지 꿀릴게 없었던 이대호가 당시 접전으로 예상되던 1차 투표에서 한 번에 물을 먹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팀 성적 때문이었다. 롯데는 그 해 7위에 그치며 포스트 시즌에 나서질 못했지만, 정규리그 3위에 올랐던 한화는 KIA와 현대를 잇달아 꺾고 한국시리즈까지 진출, 선전 끝에 준우승을 차지했는데 바로 이 점이 류현진에게 유리한 국면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이는 시즌 MVP를 뽑는 행사가 정규리그 종료 후가 아닌 포스트 시즌이 모두 끝나고 거행되는 만큼, 행사 시기상의 문제가 류현진에게 있어 또 하나의 이점으로 작용된 사례라고 볼 수 있다.(물론 반대로 유력한 후보가 포스트 경기에서의 부진으로 이미지상 되레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팀의 포스트 시즌 진출이 시즌 MVP 자격을 좌우하는 결정적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얘기로 들릴 수 있겠지만, 과거 포스트 시즌에 소속 팀이 진출하지 못했으면서도 선수 개인으로서 시즌 MVP 자리에까지 올랐던 예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1983년 삼성의 이만수는 팀이 전,후기 모두 우승권에서 밀려나는 바람에 코리언시리즈(지금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지만, 홈런왕(27개)과 타점왕(74개)을 발판 삼아 시즌 30승에 빛나는 장명부(삼미)를 누르고 MVP를 수상한 바 있다.
또한 2005년 롯데의 손민한도 롯데가 5위에 그치며 가을야구에 나서지 못했지만 다승(18승)과 방어율(2.46) 1위에 오르며 LG의 이병규(타율, 최다안타 1위)와 현대의 서튼(홈런,타점 1위) 등을 따돌리고 시즌 MVP를 차지했던 기억이 있다.
따라서 이미 포스트 시즌 진출이 사실상 좌절된 한화의 류현진을 4강 진출을 가시권에 두고 있는 롯데의 이대호에 비해 팀 성적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MVP자격을 논함에 있어 가벼이 다루려 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스럽지 않아 보인다. 팀의 부진에 대한 책임을 류현진 개인에게 물을 수는 없다.
한편 MVP를 둘러싼 또 한가지의 쟁점인 매일 출장 문제도 같은 포지션이 아닌 만큼 상대적 단순비교가 쉽지 않은 부분이다. 타자는 경기에 매일 나설 수 있지만 선발투수는 경기에 쏟아 붓는 노동강도의 양이 워낙 세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게다가 야구는 투수가 전체적인 전력의 60-70% 이상을 차지한다는 속설이 말해주듯, 투수의 비중에 관해서는 사족이 필요치 않다.
MVP의 주인공을 가리는 기준은 딱히 뭐라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 해마다 주어지는 상황이 다르고 후보들의 우열을 판별하는 표심도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각종 변수들도 한몫을 한다.
1985년 MVP에 오른 김성한(해태)의 경우, 투표가 이루어지기 전 성적만을 놓고 봤을 때 최우수선수로 뽑히기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통합 우승팀 삼성의 김시진, 장효조, 김일융, 이만수 등에 던져진 표가 분산되는 바람에 그 틈을 뚫고 어부지리(?)로 권좌에 올랐었다.
후보가 보여주는 부정적인 이미지의 영향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변수다. 우리는 과거 MVP 등극에 전혀 손색이 없는 성적을 거두고도 경기외적인 변수로 끝내 MVP 투표에서 참패를 맛보아야 했던 일부 후보들의 가슴 아픈 전례들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1983년 시즌 100경기 중 투수로서 60경기에 등판(44선발), 36경기를 완투하며 경이의 한 시즌 30승과 탈삼진 1위, 방어율 2위를 기록한 장명부의 믿기지 않는 엄청난 스탯이 이만수에게 치인 까닭은 재일동포라는 신분적 핸디캡에 고분스럽지 못한 경기매너 그리고 비신사적으로 비친‘히든 볼(볼을 감추어 주자를 기만하는 행위)’시도 등이 부정적 감점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MVP를 차지했던 1983년보다도 더욱 빼어난 기록으로 이듬해인 1984년 프로 최초의 타격 3관왕을 차지했지만,
MVP투표에서 다승 1위 (27승)의 최동원(롯데)에게 밀려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던 이만수(삼성)의 낙선사유는 일명 괘씸죄였다.
시즌 막판 3관왕 등극의 최대 고비가 된 타율부문 1위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경기에 결장을 하고, 경쟁자였던 홍문종(롯데)을 9번번 연속으로 고의4구로 출루시킨 것이 악재로 작용, 투표인단의 표심을 완전히 돌려놓은 때문이었다.
이 일 말고도 이미지를 망쳐 대사를 그르친 경우는 또 있다. 1992년 빙그레의 송진우는 다승과 구원부문 1위(당시 세이브+구원승 합계로 순위를 정함)를 동시에 차지하고도 정작 MVP투표에서는 같은 팀 동료 장종훈(홈런,타점 1위)에게 힘 한번 써보지 못한 채 56-1의 압도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는데….
송진우는 다승과 구원부문 1위 자리를 확실히 다지기 위해 시즌 막판(9월 17일) 팀이 6-0으로 앞서가던 5회 도중에 감독의 배려(?)로 등판, 선발투수의 승리를 대신 챙기며 19승을 따냈는데, 이 일이 패착이 되어 MVP 경쟁에서 참패를 당하고 만 것이다. (한편 송진우는 이 악재로 인해 MVP는 물론 연말 골든 글러브 투수 부문까지 염종석에게 넘겨주고 마는 아픔을 겪게 된다)
시즌 MVP는 연말 기자단의 투표로 결정된다. 만일 1차투표에서 과반수의 득표자가 나오지 않을 경우, 2차투표를 실시해 수상자를 결정하게 된다. 지금의 분위기로는 류현진과 이대호의 표 대결은 마지막까지 갈 가능성이 짙다. 과거 1차투표에서 수상자를 결정짓지 못해 2차투표까지 실시해야 했던 몇 차례의 초접전 양상 중 가장 경합이 심했던 해는 이승엽(삼성)과 신윤호(LG)의 맞대결이 펼쳐졌던 2001년이었다.
당시 1차투표에서 33-35로 신윤호에게 근소차 뒤졌던 이승엽은 2차투표에서 33-29로 역전에 성공하며 시즌 MVP를 낚아챈 바 있다. 이승엽의 2001년 주요 타이틀은 홈런 1위(39개) 뿐. 반면 신윤호는 다승(15승)과 승률, 구원부문 1위(18세이브+14구원승)를 동시에 차지하며 다관왕을 내세워 생애 최초의 MVP를 노렸지만 역시 팀 성적과 지명도에 발목이 잡혀 아까운 기회를 날려야 했다.
이상 열거한 사례들에서 보듯 우열을 가리기 힘든 상황에서의 표심은 언제 어떻게 어디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 기울기를 결정짓는 표심이 움직이는 시작점은 붕괴된 댐의 원인이 그러하듯, 아주 미세한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올해처럼 후보들간의 균형추가 팽팽하면 팽팽할수록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쉽게 생각했던, 별 것 아닐 것 같은 일들이 판을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시즌 막판 최우수선수 후보라면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한다. MVP에 오르는 길에 지름길은 없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꾸준히 걸어내면 그것이 곧 지름길이다. MVP를 가려냈던 수많은 역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