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마릅니다. 피가!”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2010 준 플레이오프(두산:롯데)와 플레이오프(삼성:두산)가 서로 물고 물리는 혼전으로 최종 5차전까지 치르고 나서야 승자가 가려지는 대접전 양상을 거듭하자 진이 빠질 대로 빠진 해당구단 관계자들의 얼굴은 당장 어디 가서 수혈이라도 받아야 될 낯빛이다.
거듭되는 기회와 위기의 반전과 반복이 승부와 관계없는 제3자의 관점에서는 순간순간이 아주 흥미진진한 볼거리가 되겠지만, 가슴이 타 들어가는 이해 당사자들은 차마 그 결과를 실시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용기가 없어 승부처에서 고개를 돌리고 만다.

그러다 상황이 끝나면 고개를 들고 이어지는 한 발 늦은 환호와 탄식. 대부분의 경기가 그랬지만 특히나 적지에서 2연승을 먼저 거두며 다 이겼다고 생각했던 준 플레이오프를 역 스윕 당하며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허망하게 두산에 내준 롯데의 준 플레이오프 4차전은 지금까지 벌어졌던 포스트시즌 경기 중에서 관계자들의 수명을 가장 많이 잡아먹은 경기 중의 한 경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이유는 잔루. 이날(10월 3일) 롯데가 기록한 잔루 수 17개는 역대 포스트시즌 한 팀 최다 잔루 신기록이었다. 두산의 잔루 10개와 합치면 27개로 이것도 포스트시즌 경기 최다 잔루 신기록.
0-0상황, 1회말 1사 만루/ 0-1상황, 2회말 2사 만루/ 0-1상황, 3회말 2사 1, 2루/ 0-1상황, 4회말 2사 1, 2루/ 2-2상황, 5회말 2사 2루/ 2-3상황, 7회말 2사 만루. (6회말과 8회말은 각각 2사 1루)
득점권에 주자를 갖다 놓고도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적시타 한 방이 끝끝내 터지질 않아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이지 못한 경우가 거의 롯데 공격 전 이닝에 걸쳐 분포했던 흔치 않은 경기였다.
이후 롯데는 결국 잡을 수 있었던 사직 홈에서의 4차전을 놓친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잠실로 끌려가 대패(4-11)를 당하며 한스런 시리즈를 마쳐야 했다.
사실 야구기록에서 잔루는 가장 하찮은 취급을 받는 기록항목 중의 하나다. 타석에 들어선 타자들의 공격이 이루어진 후, 팀의 공격 이닝이 끝나면 반드시 셋 중의 한가지 기록은 타자에게 남도록 되어 있다. 출루하지 못하고 아웃 되거나, 루 상에 진루했다가 득점하거나, 그대로 루 상에 남겨진 채로 공격이 끝나거나 이다. 아웃과 득점 말고 마지막이 잔루다.
그런데 ‘잔루’라는 야구용어 그대로의 말뜻처럼 남은 찌꺼기 취급을 받는 기록임에도 그 잔루가 과거에도 그랬듯 지금에도 여전히 승부를 좌지우지 저울질하고 사람들을 웃고 울게 만들고 있다. 롯데가 그날 잔루 수를 조금만 더 줄였더라면….
그러면 잔루를 줄이기만 하면 모든 결과가 좋아지는 것으로 봐야 할까? 그 속내를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다. 물론 잔루 수가 줄어들수록 반비례해 득점은 올라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잔루라는 것은 주자의 진루를 전제로 만들어지는 기록이라는 점에서 진루 자체가 어려움을 겪는 경기에서는 일단 루에 나가고 보는 것이 급선무가 된다. 득점은 차후의 문제다.
이번 준 플레이오프에서의 롯데처럼 잔루가 많아서 지는 경기도 있지만 반대로 잔루가 적어도 문제가 된다. 극단적인 예로 퍼펙트게임을 당한다면 아군의 잔루는 ‘0’가 된다. 1루 출루에 성공한 주자가 없으니 당연 공수교대 때 루상에 남아 있는 주자 수도 ‘0’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프로야구 경기 최다 잔루는 33개가 기록이다. 2002년 10월 13일 광주에서 열렸던 KIA와 LG의 경기로 연장 13회를 치르는 동안 KIA가 17개, LG가 16개의 잔루를 남겼다.
정규리그 한 경기 팀 최다 잔루 수는 21개. 무제한 이닝제 실시로 연장 18회까지 치러야 했던 2008년에 작성된 기록으로 9월 3일 두산이 한화(잠실)전에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정규이닝인 9회로 한정해 팀 최다 잔루 수 기록을 찾아보면 SK가 2002년 6월 13일 LG전(잠실)에서 기록한 19개와 삼성이 2003년 5월 28일 두산전(대구)에서 남긴 19개가 각각 최고 기록으로 나란히 올라 있다.
반대로 한 경기 최소 잔루 수는 달랑 2개다. 1996년 8월 22일 LG와 삼성(잠실)이 서로 잔루 1개씩만을 기록한 채 경기를 마쳤다.
한 팀이 아예 잔루를 단 1개도 남기지 않고 경기를 끝낸 경우는 1983년 7월 20일 해태(대 삼미전, 인천)를 시작으로 총 25차례(2009 종료기준)다.
아직 한국프로야구에서 퍼펙트게임이 나온 적이 없는데도 팀 무잔루 경기가 가능했던 이유는 루상의 주자가 견제사나 주루사 또는 도루자로 아웃되거나, 후속 타자의 타구로 함께 병살을 당하는 등의 플레이가 수반되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기록들이다.
그렇다면 잔루가 없었던 팀들은 모두 경기에서 패했을까? 아니다. 잔루가 없어지는 경우가 앞서 말한 주자아웃의 예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타자가 홈런을 치면 잔루라는 부산물 없이 바로 득점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잔루를 기록하지 않고도 이기는 경기가 가능해진다.
많아도 울고 적어도 울고, 때론 많아도 웃고 적어도 웃을 수 있는 잔루라는 기록은 어쩌면 바람에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며 시간과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 색을 뿜어내는 가을 억새 같기도 하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
화보로 보는 뉴스, 스마트폰으로 즐기는 ‘OSEN 포토뉴스’ ☞ 앱 다운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