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 아시안게임 야구에 메이저리거로서 유일하게 참가한 추신수(28)가 이번 대회에서 보여준 타격 기술은 ‘국민 타자’ 이승엽과의 우열(優劣) 논쟁까지 불러 일으키고 있다.
한국야구위원회(KBO)와 명지전문대학이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는 2010년 야구심판 양성과정 제2기의 2주차 교육이 지난 19일에도 사회교육관에서 계속됐다. 이번 2기 과정에는 일반과 전문과정에 모두 175명의 수강생들이 참석해 한국야구의 뜨거운 인기와 열기를 보여주고 있다.

공교롭게도 심판의 자세와 의무, 야구 경기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한 이날 강의가 한국과 대만의 결승전 경기 시간과 겹쳐 수강생들의 관심은 온통 긴박했던 게임 진행 상황에 쏠렸다. 이날 강의 후 한국 승리를 축하하는 모두의 환호성이 터졌음은 물론이다.
단연 화제는 추신수의 기량에 모아졌다. 그는 메이저리그에서 20홈런-20도루를 달성한 호타준족에 3할 타자이지만 전문가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는 타격을 선보였다.
상대 전력에 대한 불안감과 첫 경기라는 부담이 가장 큰 대만과의 예선 1차전에서 추신수는 연타석 홈런으로 한국의 승리를 이끌었고 홈팀 중국과 준결승에서는 2-1로 자칫 말려들기 쉬웠던 3회 말 중국 선발 루졘강의 제3구 시속 119km짜리 몸 쪽 슬라이더를 잡아당겨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대형 우월 솔로홈런을 만들어냈다. 몸 쪽으로 낮게 떨어지는 스트라이크가 아닌 완전 볼이었는데 웬만한 타자들은 치면 대개는 파울이 되는 볼이다. 몸 쪽 무릎 가깝게 아래로 떨어지는 볼로 어떻게 해서든 밀어 쳐야 겨우 파울이 아닌 페어가 될 수 있는 공이었다.
추신수가 엄청난 손목 힘으로 그 볼을 밀듯이 쳐올리는 골프 스윙, 복싱으로 말하면 어퍼컷을 날려 홈런으로 연결시키자 중국 투수 루졘강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자기 수준에서는 추신수를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듯이 보였다.
이날 심판학교 강의 후 늦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우승을 기뻐하며 야구인 관계자들과 여러 얘기를 나누던 중 나온 추신수-이승엽의 실력 비교는 공-수-주를 종합하면 추신수가 앞서고 타격만을 놓고 볼 때는 전성기의 이승엽도 절대 뒤지지 않다는 것에 의견이 모아졌다.
그런데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 당시 LA 다저스 소속의 현역 메이저리거로 참가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박찬호 얘기가 나오면서 추신수가 그와 비슷한 처지였다는 것이 언급됐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추신수가 보여준 집중력은 1998년 방콕 대회 당시의 박찬호와 같았다. 팬들의 눈에도 마치 목숨을 건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추신수도 금메달을 목에 걸고 박찬호와 마찬가지로 온갖 감정이 교차하는 눈물을 흘렸다.
덧붙여 2006년 카타르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이 1차전 대만에 2-4, 2차전은 사회인 야구 주축의 일본에 7-10으로 연패하는 ‘참사’를 당했던 기억도 떠올렸다. 당시 한국은 중국을 이기고 동메달을 따냈다. 그래서인지 이번 대회에서 추신수의 활약을 보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왜 그 때 추신수를 대표팀에 선발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당시 KBO의 총장은 하일성 현 KBS 해설위원이었고 국가대표 감독은 현대 유니콘스의 김재박 감독이 맡았다.
2006년 처음 열린 제1회 월드베이스볼 클래식(WBC)에도 국가대표로 뽑히지 않았던 추신수는 그 해 7월 클리블랜드로 트레이드돼 후반기에 메이저리그 급으로 급성장했다. 따라서 2001년 입단 이후 대부분을 시애틀의 마이너리그에서 머물던 추신수도 자신의 도하 아시안게임 국가 대표 전격 발탁 여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웠고 후일 "혹시 뽑히지 않을까 인터넷도 뒤지고 연락이 없었나 휴대전화도 확인했다”고 탈락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낸 바 있다.
도하 아시안게임 야구 대표팀은 해외파를 제외하고 포지션별 국내 최고 선수들로 구성됐다. 당시 대표팀의 주축은 타격 3관왕의 롯데 이대호,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후보 류현진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번 국가대표는 당시와 비슷한 멤버에 추신수가 ‘화룡점정(畵龍點睛)’하듯 가세한 것으로도 볼 수 있으며 그 변화만으로도 동메달이 금메달로, 치욕이 영광으로 바뀐 것으로도 평가할 수 있다.
김재박 감독은 당시 추신수를 제외하면서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그 선수 때문에 국내에서 고생한 다른 선수들을 외면하기 어렵다”고 이유를 밝혔다.
추신수가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보여준 성적은 14타수 8안타 3홈런 11타점, 사사구 9개, 타율 5할7푼1리이다. 이러한 기록을 2006년 도하에서도 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조차 쉽지 않다.
어쩌면 김재박 감독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닌지 모른다. 특히 실력에 대한 언급에 관해서는 그렇다. 2006년까지만 해도 추신수는 시애틀의 마이너리그에서 성장하고 있었고, 7월에 방출되듯 클리블랜드로 트레이드돼 기회가 주어지자 메이저리그에 올라가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비교하자면 대륙간컵에 이어 아시안게임 한국과 결승전에도 등판한 대만 투수 천훙원도 시카고 컵스 트리플A에서 시속 151km 패스트볼을 던지는 유망이지만 진정한 메이저리거 추신수를 앞세운 한국의 드림 팀을 누르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당시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어서 김재박 감독이 마치 앞장서 추신수를 제외한 것처럼 오해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신수는 그 때 국가대표에 선발 될 자격이 없었던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추신수는 부산고 3년 시절인 2008년 8월 계약금 135만 달러에 시애틀과 계약을 맺고 2001년 입단했다.
그에 앞서 한국야구계는 대한야구협회에서 무기한 자격 정지를 내린 백차승이 1998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자 1999년 이후 한국프로야구에서 뛰지 않고 해외로 진출한 선수에 대해 2년의 유예 기간이 경과한 뒤 국내에 복귀할 수 있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추신수는 이에 해당하는 선수였다. 그에게도 징계가 내려졌다. 따라서 추신수를 대한야구협회가 주관하는 아시안게임 같은 국제대회에 무작정 선발할 수는 없었다.
추신수가 ‘사면복권’된 것은 2007년 1월31일 KBO 이사회에서 1997년 이후 해외 진출 선수에 대해 5년이 경과된 경우 한시적으로 2년간 유예 조치를 해제하기로 결정하면서부터이다. 추신수 등 7명이 여기에 포함됐다.
특별 조치로 실시된 지명에서 추신수는 SK에 지명됐다. 대한야구협회의 해당 선수들에 대한 자격 정지 징계도 지명에 앞서 해제돼 프로구단 입단은 물론 국가 대표 선발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졌다.
만일 당시 도하 아시안게임 때 추신수를 국가대표로 선발하려고 했다면 그에 대한 한국야구 복귀 불가 징계부터 풀어줬어야 했다. 그 경우 다른 선수들과 형평성이 문제가 됐을 것임은 자명하다.
필자가 메이저리그를 취재하면서 다저스타디움에서 몇 차례 만났던 추신수는 야구에 대한 신념에 가득 찬 신의를 소중히 여기는 선수였다. 병역특례로 날개를 단 박찬호가 마침내 메이저리그에서 아시아 출신 투수 최다승(124승)을 작성한 것처럼 추신수는 타자로서 새로운 역사를 써줄 것으로 기대한다.
/보경S&C㈜ 대표이사, 전 일간스포츠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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