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섭의 스포츠 손자병법]女핸드볼 日 대파, 기분 좋은 한판승만일까
OSEN 최규섭 기자
발행 2011.04.26 09: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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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 종료 1분 20여 초 전, 강재원 한국 여자핸드볼 대표팀 감독은 작전타임을 요청했다. 전반 중반 이후 일본을 몰아붙여 대여섯 골 차 앞서나가며 승기를 잡은 한국의 사령탑에서 나온 작전명은 ‘스카이’였다. 김차연-유은희-김온아로 이어진 스카이플레이는 호흡이 맞지 않아 실패로 끝났다. 김온아가 허공으로 솟아오르기 전 유은희가 넣어 준 패스가 지나가며 그대로 아웃됐다.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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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 25분께 31-15, 이미 승패는 갈라졌다. 한국은 다시 한 번 화려한 스카이플레이를 시도했다. 유은희의 손끝에서 공이 벗어나는 순간 공중에 솟구친 정지해는 패스를 골로 이어가며 멋진 작품을 마무리했다. ‘아차’ 싶었다.
 
한국 여자핸드볼이 나락에서 벗어난 한판이었다. 지난 24일 광명체육관에서 열린 2011 SK 슈퍼매치 한·일 핸드볼 정기전에서 한국은 기분 좋은 승전고(32-18)를 울렸다.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준결승전에서 충격적 일격을 가한 상대였기에 기쁨이 가배(加倍)된 승리였다.
 
열네 골 차 대첩은 극명하게 갈라지는 두 가지 의미를 던졌다. 밝은 면은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반면, 어두운 면은 쓸 데 없는 걱정(杞憂)일지 모른다. 그래도 모든 일은 불여튼튼이라 하지 않았나. 그 맥락에서 짚어 볼 만한 한판이었다.
 
먼저 밝은 면을 보자. 대표적으로 신구세대의 조화와 다양한 작전을 들 수 있다. 한국은 이 대회를 앞두고 피를 수혈했다. 새로운 피는 아이로니컬하게도 노익장들이었다. 7년 만에 대표팀에 복귀한 장소희를 비롯, 최임정·김차연을 태극낭자군에 다시 합류시켰다. 셋 모두 ‘우생순’(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감격을 자아냈던 2004 아테네 올림픽 준우승 주역들이다. 
이미 뽑혀 있던 우선희·문경하까지 합하면 그때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했던 멤버가 다섯 명이나 된다. 이들은 역시 대단했다. 기량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농익은 솜씨를 뽐내며 대승을 이끌어 팬들을 매료시켰다. 많게는 열 살 이상 차이 나는 후배들을 다독인 이들의 맹활약에 힘입어 벤치는 작전 구사를 보다 다양화할 수 있는 여유를 찾았다.
 
사기도 진작됐다. 지난해 한국 여자핸드볼은 몹시 비틀거렸다. 아시안게임과 아시아선수권에서 잇달아 정상에서 밀려났다. 특히 6연패가 좌절된 광저우 아시안게임 몰락(동)은 너무나 쓰라렸다. 여자핸드볼이 아시안게임에 채택된 1990 북경 대회부터 내리 금을 휩쓸어 온 한국이었다. 당시 한국의 좌초는 준결승에서 만난 일본이란 암초 때문이었다. 가볍게 봤던 일본에 28-29로 석패, 6연속 금의 금자탑 꿈이 물거품처럼 스러졌다.<표 참조>
뜻밖에 맛본 쓰라림의 강도가 생각 이상으로 컸던 모양이다.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새로 출범한 ‘강재원호’마저 한 달 뒤 아시아선수권(카자흐스탄)에서 난파했다. 결승에서 카자흐스탄에 32-33으로 지며 3연패의 꿈을 날렸다. 설욕을 별렀던 일본과도 예선리그에서 만나 비김(22-22)으로써 모양새를 더욱 구겼다.
 
이 맥락에서 보면 ‘서울 회전(會戰)’에서 한국은 5개월 동안 쌓인 아쉬움을 훌훌 털었다. 아시아 정상을 다시 빼앗을 원기를 되찾았다. 그 대회전은 2012 런던 올림픽 아시아 예선전(10월·중국)이다.
 
그러나 세상 일은 동전의 양면일 때가 많다. 위에 열거한 밝은 면은 곧 어두운 면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한국은 올 정기전에서 다채로운 공격력을 뽐냈다. 김온아의 빼어난 리딩을 바탕으로 중앙과 양 측면에서 조화를 이룬 작전 소화 능력이 돋보였다. 김온아의 과감한 돌파, 유은희의 위력적 중거리포, 김차연의 노련한 피벗플레이, 장소희·우선희의 속공과 화려한 다이빙슛 등이 일본을 압도했다. 수비에서도 최임정-유은희-김차연을 중앙에 포진시킨 두텁고 높은 일자수비벽(6-0)은 일본의 공격을 무력화했다.
 
한마디로 한국의 완벽한 한판승이었다. 그런데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든다면 단순한 기우일지…. 한국은 이번 정기전에서 모든 걸 보여 줬다. 반면 일본은 야마노-아리하마-이시타테 중앙 삼각편대의 중거리포로 일관하는 단조로운 공격만을 선보였다. 지난해 광저우 아시안게임 당시 보였던 공수의 안정된 플레이와 끈질김을 찾기 힘들었다. 과연 이게 일본의 참모습일까?
 
전쟁은 속이는 방법(兵者詭道也)이다. 유능하면서도 무능하게 보여야 한다(能而示之不能). 스스로를 낮춰 상대가 교만하도록 해야 한다(卑而驕之·孫子兵法 第一計 始計篇).
 
한국에는 귀중한 한판이었다. 실추된 자존심을 되찾고, 저하된 사기를 높여야 했다. 다행이었다. 노렸던 모든 걸 되찾았다.
 
그렇지만 자신감과 자만심은 양날의 칼이다. 고양된 자신감은 자칫 자만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 여자핸드볼에 있어서만큼은 한국은 일본을 한두 수 아래로 여겼다. 그 자만심의 결정판이 광저우 아시안게임이었다. 행여 서울대첩이 런던올림픽 아시아 예선전에서 역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한국은 너무 많은 걸 보여 줬다. 일본은 어떤가. 올림픽 예선까지 5개월 보름 여가 남았다. 한국의 전력을 탐지한 일본이 충분히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이다. 일본은 더구나 자신의 전력은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대한핸드볼협회의 다급한 심정이 이를 거들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협회 수장을 맡은 뒤(2009년) 핸드볼은 비약적 발전이 기대됐다. 최 회장의 아낌없는 투자가 뒷받침하고 있으니 당연한 기대 심리다. 지난해만도 100억 원에 가까운 예산이 집행됐다.  
그런데 묘하게도 여자핸드볼은 국제무대에서 거꾸로 가고 있다. 아주 자연스럽게 여겨졌던 올림픽 티켓도 불투명하게 보이는 요즘이다. 카자흐스탄·일본은 두 말할 나위 없고, 홈코트의 중국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첫 걸음(아시아 선수권)을 제대로 내딛지 못한 강재원 감독으로선 이런 불안한 심리를 한꺼번에 털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을 듯하다. 풍성한 결실을 원하는 협회에 멋진 작품으로 화답하고 싶었을 성싶다. “한국 여자핸드볼은 여전히 일본의 위에 있다”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한국의 비기((祕技)인 스카이플레이의 과시로 나타났지 않았을까?
 “거짓 도망하는 적을 쫓아가지 마라(佯北勿從)”(孫子兵法 第七 軍爭篇)고 하지 않았나. 또 “불을 지르는 데 때가 있고, 불을 일으키는 데 날이 있다(發火有時 起火有日)”(孫子兵法 第十二 火攻篇)고 했다. 한국이 조급하게 치른 일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전 일간스포츠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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