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벤치에 앉지 않는다. 90분 내내 서 있다. 아니 걸어 다닌다. 테크니컬 에어리어 안에서. 그것도 쉬지 않고. 그라운드를 응시하는 매서운 눈길, 전개되는 플레이를 쫓아 어슬렁거리는 발걸음, 뭔가를 연상케 한다.
독수리의 눈과 사자의 움직임이다. 먹이를 포착하면 언제든지 날아들거나 달려들어 낚아채거나 물어뜯을 채비를 갖춘 눈길이요, 발걸음이다.

각축은 끝났다. 이겼다. 그가 포효한다. 어색하지 않다. 승장의 마땅한 전리품이다. 다시 움직인다. 어디로 향하나? 센터라인 쪽에 마련된 인터뷰 무대인가. 대첩을 이끈 장수로서 의당 그럴 듯싶다.
아니다. 그는 스탠드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아직도 승리의 감격에 젖어 함성을 내지르는 팬들이 있는 그곳이다. 자신의 전사들과 함께 인사한다. 사기를 북돋워 승리의 바탕이 된 응원에 감사한다는 마음이 잔뜩 묻어나는 몸짓이다.
최용수(38) FC 서울 감독대행의 기세가 놀랍다. 패배를 모르는 장수답다. 지난달 26일 감독대행에 오른 지 스무 날, 그의 질주는 멈추지 않는다. K리그 3연승과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1승 1무,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전과를 올렸다.
이제 FC 서울은 더는 ‘종이호랑이’가 아니다. 2010시즌 K리그 패왕의 풍모를 되찾아 가고 있음을 뚜렷하게 엿보인다. 신생 광주에마저 0-1(4월 24일·광주월드컵경기장)로 져 몹시 어렵고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던 지리멸렬의 팀이 아니다.

그가 사령탑을 맞아 치른 첫 경기(제주·2-1승·4월 30일·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움튼 상승(上昇)의 기운은 상승(常勝)으로 승화했다. K리그서 14위(승점 6·1승 3무 3패)의 나락에까지 떨어졌던 게 그 언젠가.
7위(승점 15·4승 3무 3패)로 껑충 뛰어올랐다(17일 현재). 1위(포항·승점 21·6승 3무 1패)와 불과 두 걸음(승점6) 차다. 챔피언스리그 1차 관문인 조별리그에선 1위로 16강에 나갔다.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한 상승세이며 폭발력일까? 단순한 위기감에서 분출된 처절한 몸부림에서 기인한 일시적 반전인가. “그렇다”라고 하기엔 심상찮은 기세의 승승장구다.
최 감독대행은 그 원인을 한 마음과 한 뜻에서 찾았다. “모두가 하나로 뭉쳤다. 아울러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다졌다. 지난 시즌 챔프로서 FC서울의 진정한 경기력을 되찾는 데 마음을 합쳤다”. 지난 15일 홈에서 경남을 3-1로 물리친 뒤 인터뷰에서 밝힌 ‘비결 아닌 비결’이다.
지난달 25일 황보관 감독이 사퇴 의사를 밝혔을 때, FC 서울은 백척간두의 절박한 처지였다. 1983년 12월 창단(당시 럭키금성), 프로축구 출범 둘째 해인 1984시즌부터 K리그 패권을 다툰 이래 시즌 도중 첫 사령탑 교체의 비극적 운명을 맞았으니 참담한 심경이었다.
최 감독대행도 암담한 심정이었다. 수석코치로 황보 감독을 보필했으니 팀이 몰락한 데 따른 죄책감을 떨치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전장(戰場)에서 대임을 맡았으니 죄스러움을 곱씹을 수만은 없었다. 시기는 그토록 한가하지 않았다.

기쁨과 괴로움을 같이한다(同甘共苦)
분연히 일어났다. 그런데 갈 곳이 없었다. 좀처럼 묘책을 찾을 수 없었다. 고심 끝에 그가 구한 방책은 배수진(背水陣)이었다. 손자가 말하지 않았나. “죽게 되면 어찌 병사들이 힘을 다하여 싸우지 않겠는가(死焉不得士人盡力)”(孫子兵法 第十一 九地篇).
그는 “우리가 과연 지난 시즌 패자(覇者)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우리가 물러날 곳은 더는 없다”고 선수들을 질타했다. “멸망할 처지에 빠진 뒤 존재하게 되고, 사지에 떨어진 뒤 살아남게 된다(投之亡地然後存 陷之死地然後生)”(孫子兵法 第十一 九地篇)는 말은 참으로 최고 병략가의 정화가 담긴 가르침이었다. 그(장수)의 뜻을 안 선수들(병사)들(兵識將意)은 한 마음 한 몸을 이뤄 사지를 헤치고 나왔다.
그 자신도 선수 시절 그랬다. 그는 13년 전 그날을 지금도 어제처럼 기억한다. 1998년 1월, 그는 방콕에 있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 마당을 시원스레 휩쓸고 본선 첫 담금질인 킹스컵 대회에 출전한 국가대표팀의 일원이었다.
당시 그는 국가대표팀 부동의 골잡이였다. 그는 예선리그 마지막 태국전에서 상대 수비수의 팔에 맞아 코뼈를 다쳤다. 병원 측은 2주 진단과 함께 “다시 타박받을 경우 수술해야 한다”며 휴식을 권유했다. 더구나 그는 부상의 악몽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3개월 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일본전에서 코뼈를 다쳐 수술받은 기억이 생생했다.
그러나 차범근 감독을 찾은 그는 결승전(상대 이집트)에 나가겠다고 고집했다. 월드컵 본선 첫 승의 야망을 불태우며 이 대회를 시금석으로 삼은 차 감독의 마음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동점골을 떠뜨리며 우승(승부차기 승)의 일등공신이 됐다. 3경기 잇달아 골을 낚으며 득점왕과 MVP도 아울러 거머쥐었다. 코뼈 부상은 그에게 물러나 피할 수 없는 물로 작용한 셈이었다.
이처럼 선수 때 근성 있는 플레이에서 비쳐지는 그의 이미지는 용장이다. 그런데 그는 덕장의 자세까지 갖췄다. 선수들과 하나로 어우러지려는 그의 마음에서 읽을 수 있다. 덕장의 모습은 그의 몸짓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그가 벤치에 앉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다. “선수들이 나가 온몸을 던져 싸우는데 어찌 편안히 앉아 지켜볼 수 있느냐”며 기꺼이 서서 독려한다. 제주전에선 줄기차게 내리는 비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흠뻑 젖은 채 선수들을 지휘하는 그에게서 팬들은 진정한 장수의 풍모를 엿본다.
그는 선수들에게 ‘큰형’처럼 다가간다. 은근한 카리스마로 응집력을 이끌어 낸다. 서울의 골 세리머니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경남전 후반 24분 서울의 두 번째 득점인 고요한의 결승골이 터졌을 때, 모두가 그에게 달려가 그를 껴안고 환호하는 장면은 눈물겨운 감동미까지 자아냈다.
장수와 병졸이 아닌, 한 마음 한 뜻으로 어우러진 한 몸임이 엿보인 한 편의 멋진 그림이었다. “장수는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며 배고픔과 추위도 함께해야 한다”(淮南子 兵略訓)는 말이 머릿속을 울리는 순간이었다.
그는 한 판의 승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작은 전투에서 이기고 대국에서 지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았다. 경남전은 시즌 우승으로 가는 길목의 하나의 걸림돌에 불과하다는 장기적 안목에서 치르는 한 판임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경남전 후반 막판의 지휘가 그랬다. 2-1로 리드하는 상황, 그렇지만 결코 문을 잠그지 않았다. 끝까지 적진을 공략하라고 독려했다. 후반 45분 고요한의 추가 쐐기골은 그렇게 나왔다. 기세 오른 공격력에 스스로 찬물을 끼얹지 않은 승부가의 근성이 연출한 작품이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얼마나 무기력하고 잠잠했던 골폭발이었던가. 사지를 빠져나왔어도 그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않는 뛰어난 장수의 자질을 뽐냈다.
“무척 배고팠다. 우리 팀엔 공격 본능이 뛰어난 선수들이 많다. 앞으로 더 무서운 골폭발을 기대해 달라”. 그의 승부수는 K리그에 태풍이 일 것임을 예고한다. “빠르기가 바람과 같고, …, 움직임이 우레와 벼락 같다(其疾如風 … 同如雷震)”(孫子兵法 第七 軍爭篇). 그가 이끄는 서울이 일으킬 태풍의 모습이다.
전 일간스포츠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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