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룡 삼성감독(63)이 해태의 감독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이런 저런 한가운 잡담을 늘어놓더니 갑자기 이종범(34)에 관해서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종범이는 20승 투수에 버금가는 타자다.
” 평소 무뚝뚝하고 칭찬에 인색한 코끼리감독도 이종범만큼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추켜세우곤 했다.
93년 해태에 입단한 첫해 이종범은 공수주 3박자를 앞세워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원맨쇼를 펼치며 팀을 정상으로 이끄는등 98년 일본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즈로 진출하기 이전까지 3차례나 팀을 우승시켰다.
당시까지만 해도 김응룡감독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비록 일본무대 적응에 실패, 2001시즌 국내로 복귀했지만 그는 일본진출이전까지만 해도 누가 뭐래도 국내최고의 간판스타였다.
하지만 기아유니폼을 입고 이종범은 단 한 번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이제 어느덧 34살. 야구선수로서는 황혼기에 접어든 이종범은 “야구명가의 자존심을 되살리고 싶다”는 이야기를 종종하곤 한다.
기아로 이름이 바뀌긴 했지만 해태시절부터 이어져 오는 호남야구의 자존심을 다시 세우고 싶다는 말이다.
그런 이종범이 올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있다.
비록 4위로 가까스로 포스트시즌 진출티켓을 거머쥐기는 했지만 팀이 상승세를 타고 있는데다가 팀 분위기가 최고조여서 한번 해볼만 하다는 게 이종범의 판단이다.
다른 팀들이 병풍파동의 여파로 전력누수가 심한데 비해 기아는 상대적으로 타격이 거의 없었던 것도 큰 힘이 되고 있다.
게다가 리오스 김진우로 이어지는 선발진은 물론 중간계투 마무리 모두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큰 경기에 강한 면모를 보이곤 하던 이종범은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지난해 SK와의 플레이오프에서 11타수 2안타로 부진, 팀이 한국시리즈 문턱에서 주저앉는 모습을 속절없이 지켜볼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올 포스트시즌을 명예회복의 장으로 삼겠다는 각오가 대단하다.
특히 포스트시즌의 서막을 알리는 8일 두산과의 잠실전을 잔뜩 벼르고 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팀의 톱타자로 나설 이종범은 올시즌 잠실경기에서 펄펄 날았다.
타율 3할 4푼 1리, 5홈런, 9타점.잠실벌의 사나이로 불러도 손색없는 성적이다.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다고 했다.
이종범이 준 PO 에서 어떤 활약을 펼치느냐에 따라 호랑이의 운명이 판가름 날 가능성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