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11일. 기아와 경기를 벌이던 SK는 듣도보도 못하던 투수를 마운드에 올렸다.
190cm, 90kg의 당당한 체구의 이 투수는 어딘지 모르게 설익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가 볼을 던지자 관중들은 물론 기아벤치에서도 탄성이 흘러나왔다.
전광판에 찍힌 직구스피드가 무려 156km. 2000년 중앙고를 졸업하고 프로에 입단한 데뷔 첫 해 고작 4경기에 출전했고 2001년에는 단 한 번도 1군엔트리에 포함된 적이 없는 무명이 국내 프로야구사상 가장 빠른 볼을 던졌으니 모든 사람들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도 했다.
5월10일 1군엔트리에 등록된 지 하루만의 등판이자 프로데뷔 후 통산 다섯 번째 등판에서 무려 156km의 광속구를 던진 투수는 다름아닌 엄정욱(당시 21세)였다.
그가 이날 마운드에 오른 이유는 오로지 하나 뿐이었다. 2군경기에서 상대팀 스피드건에 찍힌 159km짜리 직구를 던졌기 때문이었다.
당시까지 국내 프로야구 최고구속은 1995년 7월20일 선동렬 현 삼성감독이 LG전에서 던진 155km(비공인)였다. 그러나 프로야구선수들 조차 이름이 생소한 엄정욱이 2군에서 159km짜리 직구를 던졌다고 해서 대단한 화제를 모았다.
정회열 당시 SK 배터리 코치는 엄정욱의 볼을 받아본 후 "직구만으로는 선동렬의 구위를 능가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1군무대에서 156km의 광속구를 던진 것만으로도 화제가 될만했다. 156km는 박찬호(텍사스 레인저스)가 한양대 3학년 때 기록했던 역대 국내야구에서 가장 빠른 볼과 똑같은 구속이었다.
그 후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총알탄 사나이'.
하지만 엄정욱은 반짝했다가 또다시 팬들의 뇌리속에서 사라졌다. 제구력에 큰 문제를 안고 있는데다 타자를 상대하는 요령이 1군무대에 설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계약금 1억1,000만 원을 받고 프로에 입문한 그는 그저 미완의 대기였을 뿐이었다.
2군에서 3년동안 절치부심하던 엄정욱은 올 시즌 들어 팀의 선발투수로 급부상했다 . 시속 160km에 육박하는 직구와 120km대의 커브의 제구력이 안정되면서 올해 8승을 올렸다. 방어율은 4.06으로 기대에 못미쳤지만 삼진을 119개나 잡아내 새로운 닥터 K로 급부상했다.
이런 그의 가능성을 높이산 SK는 21일 엄정욱과 올해보다 78.6%나 오른 5,000만 원에 2005시즌 연봉을 재계약했다.
구단으로부터 기대 이상의 푸짐한 선물을 받은 엄정욱은 "올해 좋은 경험을 한만큼 내년엔 더욱 달라진 모습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올 시즌이 끝난 후 11월 말까지 실전에 버금가는 피칭을 하고 12월부터는 문학구장 드림파크에서 체력단련과 캐치볼로 벌써부터 내년시즌에 대비하고 있다. 그의 목표는 방어율을 2점대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이제 더이상 '미완의 대기'가 아닌 '승리의 보증수표'로 자리잡으려는 엄정욱이 내년 시즌에 어떤 모습을 보여줄 지 팬들의 이목이 벌써부터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