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트레이드 거부권이 있으므로 조건에 맞는 팀이 나타나야 옮길 수 있다. 내가 편하게 일할 수 있고 전력이 강화된 팀이어야 하고 이왕이면 좋은 팀에서 뛰고 싶다".
박찬호가 지난해 10월 시즌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2001년말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간 6500만달러에 계약한 박찬호가 계약서에 트레이드 거부권을 보장받았음을 처음 공개적으로 밝힌 순간이었다.
그에 앞서 박찬호의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 측도 "박찬호가 텍사스와 계약하며서 29개 전구단을 상대로 트레이드 거부권(full no-trade clause)을 보장받았다"고 공식 확인한 바 있다.
텍사스 입단 당시 메이저리그 10년차 이하였던 박찬호가 전구단 상대 트레이드 거부권을 보장받은 건 순전히 보라스의 수완이다. 메이저리그엔 구단과 선수노조간 노사 협약에 따라 '10년차 이상, 현재 소속팀에서 5년 이상 뛴 선수는 어떤 트레이드도 거부할 수 있다'는 이른바 10/5 조항이 있지만 박찬호는 올해가 텍사스 입단 4년째라 그 조항에 해당되지 않는다.
박찬호와 트레이드가 성사된 필 네빈의 경우 지난주 볼티모어로 트레이드를 거부했지만 텍사스는 그가 트레이드 거부권을 가진 8개팀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어쨌든 박찬호는 텍사스 구단이 추진하는 어떤 트레이드도 거부하고 팀에 남을 권리가 있었다. 텍사스가 트레이드 마감 시한을 이틀 앞둔 30일(한국시간) 전격 트레이드를 단행한 것은 당연히 박찬호가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지난해 밝힌 것처럼 샌디에이고를 '조건에 맞고' '편하게 일할 수 있는' 팀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현재 지구 선두이지만 전력이 썩 강한 팀이 아닌 만큼 샌디에이고 자체보다는 내셔널리그, 그 중에서도 서부지구가 박찬호를 끌어당긴 것으로 보인다. 박찬호에게 LA다저스가 속한 내셔널리그 서부지구는 모태와도 같은 곳이다. 선수들의 물갈이가 빈번한 메이저리그이지만 풀타임으로만 6년을 보낸 서부지구엔 박찬호가 잘 알고 있는 타자들이 아직도 많다. 물론 타자들도 박찬호를 잘 알고 있지만 박찬호 역시 4년 전 아메리칸리그로 옮겨왔을 때보다는 적응이 훨씬 덜 힘들 수 있다.
박찬호의 마음도 미국에 첫 발을 내딛었던 곳인 캘리포니아를 완전히 떠나지 않고 있었다. 99년 LA 인근 베벌리힐스에 197만달러짜리 저택을 구입했던 박찬호는 얼마 전 그 집을 팔았지만 대신 LA 남쪽 해안가에 새로 집을 사 현재 동생 박헌용 씨가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LA와 샌디에이고는 자동차로 2시간 남짓 걸리는 가까운 거리다.
텍사스 지역 언론들의 끈임없는 공격도 박찬호의 선택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현지 시간으로 트레이드 되던 날 아침 텍사스 지역 언론은 '박찬호를 한국 프로야구 구단으로 팔라'고 포문을 열었다. 귀를 닫고 트레이드를 거부한 채 그냥 남을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 '팀의 장래를 가로막는다'며 또다시 집중포화를 받을 게 뻔했다. 그런 박찬호로선 더이상 시달림을 받지 않고 '편하게 일할 수 있는' 곳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올해 연봉 650만달러인 김병현의 경우 콜로라도가 60만달러 정도만 부담하는 조건으로 팀을 옮긴 뒤로 한결 마음의 부담을 덜었다. 아직 텍사스-샌디에이고간 거래 내용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텍사스가 박찬호의 올해 및 내년 연봉 중 상당액을 부담하는 조건일 가능성이 있다.
결국 이번 트레이드는 추진은 텍사스가 했지만 '새 출발'을 원한 박찬호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종민 기자 mini@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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