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보스턴 레드삭스를 월드시리즈 정상으로 이끌며 메이저리그 정상급 투수임을 재확인한 커트 실링(39.보스턴)은 "1991년 클레멘스와 단 하루의 만남이 내 인생을 바꿨다"고 말한 적이 있다.
볼티모어에서 메이저리그 데뷔 후 3년간 1승 6패라는 형편없는 성적을 낸 실링은 91년초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트레이드됐다. 애스트로돔 웨이트룸에서 하릴 없이 시간을 죽이던 실링에게 어느 날 당시 최고 투수로 위용을 날리던 로저 클레멘스가 다가왔다.
보스턴 레드삭스 소속이지만 집 근처 애스트로돔 시설을 이용해 훈련하던 클레멘스는 보스턴에서 2년간 마이너리그 생활을 해 안면이 있는 실링을 따로 불러 1시간이 넘도록 일장훈시를 했다. 클레멘스는 그때 이미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20개)에 아메리칸리그 MVP, 사이영상도 두 차례 수상한 대투수였고 실링은 아직 애송이였다.
'소질에 비해 실력 발휘를 하지 못하는 건 느슨한 태도에 문제가 있다. 훈련 방법부터 고쳐야 한다'는 게 실링이 지금까지 기억하는 클레멘스의 조언이었다. "그날 이후 난 인생과 야구를 보는 눈이 달라졌고 다른 선수가 됐다"는 게 실링의 말이다.
필라델피아에서 에이스로 성장한 실링은 애리조나로 옮긴 지난 2001년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뉴욕 양키스 소속이던 '사부' 클레멘스와 선발 맞대결을 벌였다. 6⅓이닝 1실점을 기록한 클레멘스와 7⅓이닝 2실점한 실링 모두 승패를 기록하지 못했고 월드시리즈 정상은 결국 9회말 루이스 곤살레스가 마리아노 리베라를 상대로 터뜨린 빗맞은 끝내기 안타로 갈렸다.
실링이 스치는 듯한 만남에서 감화를 받았다면 크리스 카펜터(30.세인트루이스)는 그보다 훨씬 더 행운아다. 93년 드래프트 1라운드(전체 15순위)로 지명받고 토론토 블루제이스에 입단한 카펜터는 메이저리그 승격 첫 해인 97년 FA 자격으로 블루제이스 유니폼을 입은 클레멘스를 만났다. 99년 클레멘스가 뉴욕 양키스로 떠나기 전까지 2년간 클레멘스와 선발 로테이션을 이룬 카펜터는 "어린애에 불과한 나를 클레멘스는 '어디든 따라와도 좋고 무엇이든 물어봐도 좋다'고 배려했다"고 아직까지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
지난 올스타게임에서 내셔널리그 올스타로 나란히 마운드에 오른 카펜터와 클레멘스(43.휴스턴)는 지난달 18일 맞대결에서 불꽃튀는 투수전을 펼쳐 카펜터가 3피안타 완봉승으로 7이닝 3실점을 한 클레멘스에 완승을 거뒀다. 1.38의 경이적인 방어율을 기록 중인 클레멘스와 내셔널리그 다승 선두로 세인트루이스를 리그 최고 승률로 이끌고 있는 카펜터는 곧 있을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투표에서도 경합이 불가피하다.
이대로 시즌이 끝난다면 지구 선두인 세인트루이스와 와일드카드 1위인 휴스턴은 같은 지구 소속이라 디비전시리즈에선 맞붙지 않겠지만 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선 맞닥뜨릴 수 있다. 지난해 카펜터가 부상으로 빠진 세인트루이스와 챔피언십시리즈 7차전에서 패전의 멍에를 썼던 클레멘스는 '청출어람'의 카펜터를 넘어야 세 번째 월드시리즈 반지를 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휴스턴이 올시즌 클레멘스에게 지급한 투수 최고 연봉 1800만달러엔 클레멘스 본인의 활약 외에도 로이 오스월트,브래드 리지,브랜든 베키 등 앞으로 수년간 휴스턴을 이끌어갈 젊은 투수들에게 귀감이 되달라는 뜻까지 담겨있다. 텍사스가 낳은 전설적인 대투수 놀란 라이언을 흠모하며 메이저리거의 꿈을 키운 로저 클레멘스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수많은 후배 투수들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은퇴한 클레멘스가 아닌 현역 클레멘스를 지켜볼 수 있는 건 팬들에게도 분명 행운이다.
이종민 기자 mini@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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