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를 올바로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좋은 수비와 튼튼한 피칭, 빠른 주루 플레이다. 내 방식대로 따라오지 않는 선수는 기용하지 않겠다".
지난 2003년 말 5~6명에 달하는 경쟁 후보들을 물리치고 시카고 화이트삭스 감독에 선임된 아지 기옌(41)은 취임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역에서 은퇴한 지 불과 3년, 마이너리그에서조차 사령탑 경험이 전무한 초보 감독의 취임 일성치곤 대담했다. 화이트삭스에서 뛴 13년간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기옌이지만 감독으로 걸음마를 떼는 그에게 쏠린 시선은 썩 호의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기옌은 개의치 않고 갈 길을 갔다. 1980년대 후반 역시 화이트삭스에서 3년간 함께 선수 생활을 한 동갑내기 켄 윌리엄스 단장과 코드를 맞춰 투타 모두에서 팀 컬러를 바꾸기 시작했다. 지난해 6월 프레디 가르시아, 7월말 트레이드 마감일에 호세 콘트레라스를 데려온 게 신호탄이라면 올해 초인 지난 1월 중심타자 카를로스 리를 밀워키에 내주고 스캇 퍼세드닉을 받은 건은 결정판이었다.
FA 자격을 얻은 호세 발렌틴과 마글리오 오도녜스까지 미련없이 떠나보낸 화이트삭스는 저메인 다이와 일본인 타자 이구치 다다히토를 영입했다. 윌리 해리스-후안 우리베가 맡던 1~2번을 퍼세드닉-이구치의 확실한 테이블 세터들로 바꿨고 발 빠르고 어깨 좋은 다이로 우익수 수비를 강화했다. 더스틴 허맨슨과 모두가 꺼리던 올란도 에르난데스 등 베테랑 투수들을 영입, 마크 벌리-존 갈랜드 등 젊은 어깨들 위주인 마운드에 경험의 균형을 보탰다.
개편의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지난해 팀 득점 아메리칸리그 3위에 팀 방어율은 14개팀 중 12위로 텍사스처럼 '한 방'의 팀이었던 화이트삭스는 올 시즌 팀 방어율 3위-팀 득점 9위의 '지키는 야구'의 팀으로 대변신했다. 같은 쿠바 출신 에르난데스와 손을 잡은 콘트레라스가 15승을 거두며 아마추어 시절의 위용을 되찾자 2,4선발의 짐을 버거워하던 갈랜드는 전반기에만 12승을 거두는 등 데뷔 후 최다인 18승으로 우뚝 섰다. 빌리 코치, 다카쓰 신고가 떠난 마무리 자리는 허맨슨이 메워내다 LA 에인절스가 버린 '100마일 루키' 바비 젱크스를 건져내는 등 운도 따랐다.
코너코를 빼곤 거포들을 모두 떠나보낸 타선도 힘은 떨어졌지만 효율성은 오히려 높아졌다. 화이트삭스는 지난해 242홈런에 경기당 5.3득점으로 각각 아메리칸리그 1위와 3위를 기록했지만 83승을 거둬 미네소타에 9게임이나 뒤진 지구 2위에 그쳤다. 올 시즌 화이트삭스는 200홈런(4위) 4.7득점(9위)로 뒷걸음질쳤지만 99승을 거둬 리그 라이벌 미네소타는 물론 막판 매섭게 따라붙었던 클리블랜드도 6게임차로 여유있게 제쳤다. 잃은 것은 홈런이고 얻은 것은 승리였다.
지난해 1점차 경기 28승18패, 연장전 7승 9패에 그쳤던 화이트삭스는 올 시즌 1점차에서 무려 35승 19패, 연장전 13승 8패로 두 부문 다 메이저리그 전체 1위를 차지했다. 기옌 감독이 20년 지기 윌리엄스 단장과 손을 잡고 추구한 '스몰볼'의 산물이다.
"기옌은 의사소통에 능한 사람이다. 라틴 선수들을 잘 다루고 야구 지식도 박식하다. 생기있고 활달해서 모두의 긴장을 풀어준다. 가끔은 입을 막을 필요가 있긴 하지만 그건 그의 천성이다". 지난 2003년 플로리다 말린스를 월드시리즈 정상에 세운 잭 매키언 감독은 2년간 코치로 데리고 있던 기옌을 이렇게 평가했다.
제리 매뉴얼 전임 감독도 뛰어난 지도자로 평가받았지만 선비 스타일의 매뉴얼에 베테랑 선수들 위주로 짜인 화이트삭스는 절간처럼 조용했다. 초보 감독 기옌에게는 팀 분위기와 전력을 함께 바꾸는 힘겨운 책무가 주어졌지만 기옌은 2년만에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팀에 안기는 누구도 예상 못한 일을 이뤄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입으로 뱉어내 솔직함에 관해선 '잠금 밸브'가 없다는 평을 듣는 아지 기옌. 하지만 쉴 틈없이 말을 쏟아내면서도 결코 선수들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선 메이저리그 최고의 명감독 코치로 꼽히는 토니 라루사와 데이브 덩컨, 리오 마조니를 닮았다. 베네수엘라 출신 첫 메이저리그 사령탑으로 화이트삭스를 88년만에 정상에 세운 기옌이 보여준 새로운 리더십은 두고두고 연구 대상이 될 것 같다.
이종민 기자 mini@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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