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 100마일. 킬로미터로 환산하면 약 160.93km. 스피드가 생명인 투수, 특히 매 순간이 승부처인 마무리 투수에게 100마일은 축복이자 저주의 숫자이기도 하다.
스피드건으로 재는 투수들의 구속은 메이저리그나 한국 프로야구나 공식 기록 항목이 아니다. 따라서 공인 최고 구속이란 있을 수 없다. 모두 비공인임을 전제로 메이저리그 사상 실전에서 기록된 최고 구속은 시속 102마일(약 164km)이다. 롭 넨(1997년)과 아르만도 베니테스(2002년) 랜디 존슨(2004년)이 한 차례씩 기록한 적이 있고 가장 최근엔 바비 젱크스(시카고 화이트삭스)가 지난 8월 28일(한국시간) 시애틀 매리너스전에서 스피드건에 102마일을 찍었다. 애틀랜타 마무리 투수였던 마크 월러스가 1995년 스프링캠프에서 103마일까지 던진 적이 있다지만 역시 비공인 기록이다.
공인이든 비공인이든 그야말로 광속구라 할 수 있는 100마일대 공을 뿌리는 투수들의 대부분이 소방수들이다. 광속구를 던지기에 마무리로 발탁된 이들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 중엔 소방수로 크게 성공한 투수는 드물다. 월러스는 갑작스레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는 이른바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으로 스러져갔고 베니테스도 2000년 양키스와 서브웨이 시리즈 1차전 블론 세이브를 기록한 이후론 저니맨으로 전락했다.
롭 디블과 호세 메사, 카일 판스워스 등 수시로 100마일을 찍으면서도 마무리 투수로 결코 성공했다고 말할수 없는 투수들은 이들 말고도 많다. 랜디 존슨과 바르톨로 콜론, C.C.사바티아 등 '100마일 클럽' 중에 에이스로 우뚝 선 선발투수들이 즐비한 것과 대조적이다. 물과 기름처럼 뒤섞이기 힘든 스피드와 컨트롤의 딜레머를 잘 말해주는 부분이다. 던지는 공마다 타자들을 압도해야하는 소방수에게 빠른 공은 큰 무기지만 단 한 개의 실투도 패전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광속구는 양날의 칼과 같다.
빌리 와그너(34.필라델피아)는 그런 점에서 '별종'에 가깝다. 좌완으로 시속 100마일의 불같은 강속구를 뿌리는 와그너에게도 컨트롤 불안으로 물음표가 따라붙던 시절이 있긴 했다. 하지만 더이상은 아니다. 올 시즌 38세이브 방어율 1.51로 메이저리그 소방수중 최고의 활약을 펼친 와그너는 지난 2001년부터 최근 5년간 195번의 세이브 기회 중 177번을 성공시켜 91퍼센트의 놀라운 성공률을 기록했다. '제국의 수호신' 마리아노 리베라(뉴욕 양키스)가 같은 기간 90퍼센트의 성공률(239번 중 214번)을 기록한 것에 버금간다.
올 시즌 900만 달러를 받은 와그너는 FA 자격을 얻어 리베라(연봉 1050만 달러)를 능가하는 마무리 투수 사상 최고액 계약을 노리고 있다. 뉴욕 메츠와 보스턴, 애틀랜타 등이 영입 경쟁에 뛰어들 것으로 보여 와그너의 꿈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스피드와 컨트롤, 두마리 토끼를 잡은 데 대한 보상이다.
메이저리그엔 와그너 말고도 '100마일 소방수'가 몇 더 있다. 화이트삭스 월드시리즈 우승의 주역 바비 젱크스(24)도 그 중 하나다. LA 에인절스 산하 마이너리그 시절 겨울리그에서 최고 104마일까지 던진 적이 있는 젱크스는 휴스턴과 월드시리즈에서도 100마일짜리 광속구를 겁없이 꽂아대며 1차전과 마지막 4차전에서 거푸 한 점차 세이브를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2차전에선 대타 비스카이노에게 2타점 적시타를 맞고 승리를 날려 볼끝이 없는 강속구는 메이저리그 타자들에게 여지없이 얻어맞을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기도 했다.
올 시즌 일약 주전 마무리로 발돋움한 데릭 턴보(27.밀워키)도 98마일은 기본에 100마일도 어렵지 않게 찍는 광속구 파다. 젱크스처럼 지난해 11월 웨이버에서 지명돼 LA 에인절스에서 밀워키로 옮긴 턴보는 올 시즌 7승 1패 39세이브, 방어율 1.74로 댄 콜브(애틀랜타)가 떠난 자리를 완벽하게 메워냈다. 젱크스와 턴보 두 100마일 투수를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놓친 에인절스론 땅을 칠 노릇이지만 때늦은 후회일 따름이다.
마무리 투수에겐 필요악이라고 할 수 있는 광속구를 장착한 소방수들이 과거 '선배'들의 실패를 딛고 내년 시즌엔 더욱 두각을 나타낼 것으로 보인다. 김병현이 90마일대 초반의 공으로도 애리조나의 주전 마무리를 맡아 활약했던 게 아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이종민 기자 mini@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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