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의 일이다. 박찬호에 이어 한국인으론 두 번째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조진호(보스턴)가 등 통증으로 15일짜리 부상자 명단(DL)에 올랐다. DL에 올라 15일을 채우고 16일째가 됐는데도 보스턴 구단에서 아무런 발표가 없자 현지에서 취재 중이던 한국 특파원들이 비상이 걸렸다.
구단 관계자들과 바로 연락이 닿지 않아 조진호의 에이전트에게 문의한 결과 돌아온 답은 "부상이 완쾌되지 않아 DL이 15일 더 연장된 것 같다"는 것이었다. 15일짜리 DL이든, 60일짜리 DL이든 로스터에 재등록하기 위한 최소 기간에 대한 제한일 뿐 별도의 연장 조치가 필요없다는, 지금은 상식이 된 메이저리그의 기본적인 룰조차 몰라 빚어진 해프닝이었다.
오래 된 얘기를 꺼낸 이유는 구대성(36)의 계약과 관련 또다시 의문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와 등 뉴욕 지역 신문들은 최근 뉴욕 메츠가 구대성의 내년 시즌 옵션 200만 달러를 포기하기로 했지만 내년 시즌 '미국 내 보유권(U.S.right)'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옵션을 포기한다면 방출되는 게 마땅한데 여전히 보유권을 가지고 있다는 해괴망칙한 내용이 알려지자 '구대성이 노예 계약을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다.
노예계약이라는 말은 지나칠지 몰라도 구대성이 메이저리그에 남을 경우와 마이너리그로 떨어질 경우 다른 연봉을 받도록 '스플릿 계약'을 해 올 시즌 고작 연봉 40만 달러를 받은 데 이어 상당히 불평등한 계약을 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 좋은 판단의 근거가 최근 뉴욕 양키스와 재계약 협상을 벌이고 있는 마쓰이 히데키다.
마쓰이는 지난 2003년 양키스와 3년간 2100만 달러에 입단에 합의하면서 '3년 계약이 끝난 뒤 양키스와 재계약에 합의하지 않을 경우 FA 자격을 얻는다'는 조항을 삽입했다. 그 시한이 오는 16일로 닥쳐 브라이언 캐시먼 단장 등 양키스 수뇌부가 바삐 움직이고 있다.
마쓰이의 계약은 미국 내 아마추어 드래프트를 거치지 않은 외국인이 메이저리그 팀과 입단 계약을 하면서 얻을 수 있는 최고치에 가깝다. 1994년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박찬호도 1999년 한국 선수론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계약을 하며 애리조나에 입단한 김병현도 '3년 뒤 FA'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보장받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박찬호도 김병현도 미국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풀타임 6년을 채우고서야 FA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반면 근 1년만에 전모를 드러낸 구대성의 계약은 선수에게 유리할 게 거의 없는 그야말로 바닥에 가깝다.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 한국인 에이전트는 이에 대해 "기본적으로 메이저리그 팀과 계약은 모든 상황의 조합이 가능하므로 구대성의 계약이 잘못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면서도 "구단이 옵션을 포기했는데도 여전히 보유권을 가지고 있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대목"이라고 말했다.
아마추어 선수였던 박찬호 김병현은 물론 구대성도 일본 프로야구 최고 스타 출신인 마쓰이와 비할 바는 아니다. 마쓰이와 같은 유리한 조건으로 메이저리그 입성을 노린다는 것 자체가 욕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룰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부족한 에이전트를 통해 미국 진출을 꾀하다간 구대성처럼 선의의 피해자가 되기 십상이다.
안타까운 노릇이지만 구대성은 메이저리그 진출을 꿈꾸는 수많은 국내 선수들에게 값진 교훈이 될 것 같다.
이종민 기자 mini@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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