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 돌풍'과 배구판의 '모럴 해저드'
OSEN U05000014 기자
발행 2005.12.26 11: 28

여자 배구판에 김연경(17.흥국생명) 돌풍이 거세다. 한일전산여고 3학년으로 아직 졸업장도 받지 않은 김연경이 성인 배구 코트를 휘저으면서 "한국 여자 배구에도 드디어 새 희망이 보인다"는 찬사가 잇따르고 있다. 김연경이 얼마나 대단한 지는 금세 알 수 있다. 김연경은 25일 KT&G전까지 8경기에서 무려 219점을 뽑아 여자부 득점 선두를 달리고 있다. 현재 남자부 득점 1위는 9경기에서 164점을 뽑은 이경수(LG화재)다. 여자부는 백어택이 2점이지만 김연경의 후위공격(33개)을 모두 1점으로 쳐도 한 경기를 더 한 이경수보다 득점이 많다. 지난해부터 김연경을 눈여겨봐온 남자부의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조차 "장신(188cm)이면서도 순발력과 탄력이 전혀 떨어지지 않아 세기만 가다듬으면 여자 배구의 대들보가 될 것"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지난 2005 V-리그에서 3승 13패로 5개 팀중 꼴찌였던 흥국생명은 김연경을 앞세워 벌써 6승(2패)을 따내며 단독 선두를 질주하고 있다. 김연경의 출현과 이에 따른 여자 배구의 판도 변화는 반갑기 그지없지만 한편으론 씁쓸함을 남긴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는 배구판의 고질적 병폐가 다시 한 번 드러났기 때문이다. 프로배구 원년인 지난 2005 V-리그에서 흥국생명은 시즌 막판 GS칼텍스와 두 경기에 황연주와 박수경 주미경 등 주전 3명을 잇달아 출전시키지 않았다. 손목과 무릎 부상 등 이유는 제각각이었지만 최하위를 '다투던' GS칼텍스전에서 패해 꼴찌를 굳히려는 의도임은 짐작키 어렵지 않았다. 꼴찌가 되면 드래프트 1순위가 돼 초고교급 거포 김연경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배구뿐 아니라 어느 종목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정작 이해하기 힘든 장면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작전대로 GS칼텍스과 두 경기에서 내리 0-3으로 패해 최하위를 확정한 흥국생명은 불과 닷새 뒤인 현대건설과 시즌 최종전에는 "부상으로 뛰지 못한다"던 세 선수를 모두 투입했다. 당시 현대건설은 도로공사, KT&G와 피말리는 선두다툼을 벌이던 터라 플레이오프를 거치느냐, 챔피언결정전에 직행하느냐가 최종전 승패에 걸려있던 터였다. 하지만 현대건설은 GS칼텍스전 연속 결장으로 푹 쉰 세 선수들이 펄펄 난 흥국생명에 풀세트 접전 끝에 무릎을 꿇었다. 허무하게 챔피언전 직행이 좌절된 현대건설은 플레이오프에서도 KT&G에 맥없이 패해 시즌을 마쳤다. 황현주 흥국생명 감독은 경기 후 "부상이 안 나았지만 시즌 최종전이라 선수들이 뛰겠다고 해 내보냈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기자의 눈엔 김연경은 이미 손에 넣었으니 시즌 최종전은 이기고 끝내겠다는 황 감독의 의도가 동업자 정신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선수 폭행으로 물의를 빚은 남자부 감독들보다 몇 곱절 더 스포츠맨십을 어긴 '더티 플레이'로 비쳐졌다. 어디나 물을 흐리는 자가 있는 법이지만 문제는 배구 관계자들의 반응이다. 당시 흥국생명의 고의 져주기 추태에 대해 한국배구연맹(KOVO) 차원에서 어떠한 조사나 조치도 없었다. 그런가 하면 '피해 당사자'인 여자팀의 한 감독은 최근 "내가 흥국생명 감독이었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말해 기자를 아연하게 했다. 역대 한국스포츠사에서 배구만큼 스카우트 분쟁을 많이 겪은 종목도 드물다. 삼성화재가 몇 번이나 드래프트 룰을 어기고 선수들을 싹쓸이했고 LG화재도 이경수 파동을 일으켰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가능하다는 배구인들의 믿음은 배구인들 사이에선 "그럴 수도 있다"는 공감대를 얻고 있는지 몰라도 이를 지켜보는 팬들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1970~80년대 최고 인기 종목이었던 배구의 인기가 급격히 식은 것도 배구계의 '모럴 해저드'와 이에 따른 스카우트 무질서와 무관치 않다. 프로배구가 막 걸음마를 내디딘 마당에 김연경 같은 '슈퍼 루키'의 출현은 대단한 낭보다. 하지만 김연경의 맹활약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뒷맛은 개운치 않다. 우리는 왜 스포츠에 열광하고 새로운 스타의 출현에 환호하나. 복잡하고 살기 힘든 세상사보다도 더 찌들고 더러운 승부 조작과 '등 뒤에서 칼을 찌르는' 배신극을 원해서는 아닐 것이다. 이종민 기자 mini@osen.co.kr 김연경(왼쪽)의 영입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흥국생명 [Copyright ⓒ 한국 최고의 스포츠 전문 미디어 OSEN(www.ose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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