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멘스-허스트의 특별한 WBC '재회'
OSEN U05000176 기자
발행 2006.02.03 11: 50

1986년 뉴욕 메츠와 월드시리즈 6차전은 보스턴 레드삭스 팀 역사상 최악의 패배로 남아있다. 월드시리즈 우승에 아웃카운트 한 개를 앞두고 터져나온 빌 버크너의 '알까기'로 악명 높지만 그것 말고도 많은 이야기들이 이 한 경기에 담겨있다. 6차전 보스턴의 선발투수는 로저 클레멘스였다. 5차전까지 3승 2패로 앞서나가며 1918년 이후 68년만의 첫 우승에 1승 앞으로 다가선 존 맥나마라 보스턴 감독은 '마지막' 경기를 클레멘스에게 맡겼다. 보스턴 팬들은 페넌트레이스에서 한 경기 20탈삼진 신기록을 세우는 등 24승 4패 방어율 2.48로 데뷔 3년만에 에이스로 우뚝 선 클레멘스의 공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클레멘스는 월드시리즈가 끝난 뒤 생애 첫 사이영상과 아메리칸리그 MVP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드와이트 구든과 맞대결을 펼친 2차전에서 4⅓이닝 3실점으로 부진했던 클레멘스는 6차전에선 7회까지 4피안타 2볼넷 8탈삼진 2실점(1자책)으로 쾌조의 피칭을 이어갔다. 7회초에도 메츠 타선을 삼자범퇴시키는 등 경기 후반까지 위력을 잃지 않았지만 3-2 한 점차로 앞서던 7회말 맥나마라 감독은 클레멘스 타석에 대타를 기용했다. 클레멘스는 더 던지겠다고 고집했지만 투구수가 130개를 넘긴 데다 손가락 물집이 터져 피가 배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클레멘스의 데뷔 첫 월드시리즈 승리는 구원 등판한 캘빈 쉬랄디가 8회 곧바로 동점을 허용, 허망하게 날아갔다. 결과론이지만 이 투수교체는 보스턴에 뼈아팠다. 경기후 인터뷰에서 맥나마라 감독이 "클레멘스가 더 던질 수 없다고 했다"고 밝히자 격분한 클레멘스가 감독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교체는 감독 권한이지만 진실을 말하라"고 소동을 피우기도 했다. 경기는 연장전으로 접어들었고 보스턴이 10회초 공격에서 곧바로 2점을 뽑아내자 셰이 스타디움 원정 라커룸은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사진 기자들이 미리 자리를 잡기 위해 몰려들고 직원들은 샴페인 박스를 나르고 라커엔 샴페인이 묻지 않도록 비닐 포장이 씌워졌다. 기자석에서 급히 실시한 월드시리즈 MVP 투표에선 1차전과 5차전에서 17이닝 동안 단 2점만 내주고 내리 승리를 따낸 브루스 허스트가 4표를 얻어 MVP로 예비 당선이 된 상태였다(한국 프로야구도 한국시리즈에서 최종전이 될 경기가 끝나기 직전 MVP 투표를 실시한다). 허스트는 1차전에선 1918년 베이브 루스 이후 보스턴 좌완 투수론 첫 월드시리즈 첫 판 승리를, 5차전에선 역시 루스 이후 보스턴 왼손 투수론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홈 경기 승리를 따내 '밤비노의 저주'를 풀어낸 주역으론 적격이었다. 허스트의 월드시리즈 MVP와 보스턴의 우승이 날아간 과정은 너무도 상세하게 알려져 있다. 보스턴 세 번째 투수 밥 스탠리는 10회말 첫 두 타자를 잡아냈지만 대타 케빈 미첼에게 안타를 맞은 것을 시작으로 연속안타와 폭투로 동점을 허용했고 계속된 2사 1,3루에서 1루수 버크너의 끝내기 알까기 실책이 터져나왔다. 5차전으로 자신의 몫은 끝났다고 생각한 허스트는 7차전에 부랴부랴 다시 선발 등판했지만 6이닝 3실점하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메츠도 선발 론 달링이 일찍 무너졌지만 로저 맥도웰(현 애틀랜타 투수코치) 등 구원 투수들의 역투로 8-5로 역전승, 보스턴의 품에 안기는 듯했던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낚아채갔다. 허망하게 우승을 날린 허스트는 이후로도 샌디에이고와 콜로라도 등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며 통산 145승을 따냈지만 다시는 월드시리즈 마운드에 오를 기회를 얻지 못했다. 클레멘스 역시 1986년 운명의 6차전 이후 보스턴 유니폼을 입고는 다시 월드시리즈에 나서지 못했다. 2004년 보스턴의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제는 역사책 속으로 더욱 묻혀버린 20년 전 비운의 두 주인공들이 다음달 펼쳐지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나란히 나선다. 나이를 잊은 클레멘스(44)는 미국 대표팀 에이스로 출전할 것이 유력하고 허스트(48)는 중국 대표팀 투수코치로 1라운드에서 한국과 격돌하게 된다. 클레멘스에게도 허스트에게도 이번 WBC는 새로운 도전이다. 휴스턴과 재계약 불발로 선수 생활 연장과 은퇴의 기로에 선 클레멘스는 WBC 피칭을 통해 23번째 메이저리그 시즌을 뛰어야 할지 결정하려 하고 있다. 허스트는 역시 메이저리거 출신인 제임스 르페이버 감독과 함께 WBC 16개 참가국 중 최약체로 꼽히는 중국 팀을 이끌고 세계 야구의 벽에 정면으로 맞부딪쳐야 한다. 지난 2003년부터 중국 투수들을 조련해 온 허스트는 자신과 같은 좌완 투수인 애제자 왕난을 비장의 카드로 숨겨두고 있다. WBC A조에 속한 중국은 일본에서, B조의 미국은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각각 1라운드를 치르게 돼 중국이 한국이나 대만을 꺾는 대이변을 연출하지 않는 한 허스트와 클레멘스가 직접 대면할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밤비노의 저주에 온몸으로 맞섰다 상처를 받고 물러서야 했던 두 베테랑이 다시 한 무대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어 보인다. 이종민 기자 mini@osen.co.kr [Copyright ⓒ 한국 최고의 스포츠 전문 미디어 OSEN(www.ose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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