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선동렬의 뒤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OSEN U05000014 기자
발행 2006.02.10 22: 38

불세출의 스타 플레이어 뒤에는 하인스 워드처럼 어머니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도 있었다. 84세를 일기로 10일 유명을 달리한 삼성 라이온즈 선동렬(43) 감독의 부친 선판규 씨는 아들로 인해 야구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삶을 살았다. 당시로서는 야구판에 별로 흔하지 않던 열성 아버지로 최동원(48) 한화 이글스 코치의 선친 최윤식 씨에 이어 야구팬들에게까지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선동렬 감독이 국보급 투수로 이름을 날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친이 끼친 영향은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야구선수였던 큰 아들이 일찍 세상을 등진 후 형의 몫까지 다하려는 작은 아들에게 고인은 그야말로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선 감독이 송정중학교 1학년 때 벌써 집 근처 공터의 땅을 고르고 야간훈련을 할 수 있게 등불도 달아주었다. 고인은 아들과 관련한 숱한 일화도 남겼다. 광주일고를 졸업한 유망주 선동렬이 대학에 진학해야 할 때였다. 서울의 모 대학에서 돈 보따리를 싸들고 당시 광주 송정리로 고인을 찾았다. 하지만 고인은 “내 아들은 돈 몇 푼 놓고 흥정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며 유혹을 뿌리치고 고려대에 진학시켰다. 선 감독이 고려대 재학 시절 학교 앞에 단골 갈비집이 있었다. 선 감독은 이 곳에 무시로 드나들며 훈련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혼자만이 아니라 야구부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 들 때도 많았다. 선 감독이 이렇게 비싼 갈비를 야구부 선후배들과 함께 마음껏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선친 덕분이었다.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자 고인은 학교 앞 음식점을 찾아가 주인에게 말했다. “앞으로 우리 애가 오면 달라는 대로 줘라. 값은 내가 한 달에 한 번씩 올라와서 치르겠다”. 뿐만 아니라 선 감독이 큰 대회를 치른 후면 어김없이 광주에서 올라와 아들 손을 붙잡고 고향집으로 데려가곤 했다. 연투로 지친 아들의 어깨도 쉬게 하고 주변에서 온갖 좋다는 약을 다 구해다 먹이기 위해서였다. 선 감독이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은 후인 1985년부터는 선 씨가 직접 구단과 연봉협상에 나서는 등 극진한 부정을 보이기도 했다. 이른 바 ‘공짜손님’ 파문을 일으켰던 것은 선 감독이 해태에 입단한 지 3년째인 1987년이었다. 입단 2년째 연봉 2400만 원을 받은 선 감독이 24승 6패 6세이브의 성적을 올린 뒤 고인은 구단과 무려 3개월 동안 8차례나 이어지는 지리한 협상을 벌였다. 4500만 원을 제시한 구단에 대해 고인은 투수 최고 대우을 요구했다. 고인은 구단이 자신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자 6차 협상에서 “올 시즌 연봉 없이 백지계약하고 무료봉사를 시키겠다. 대신 선동렬이 등판하는 경기에는 관중도 무료 입장 시켜야 한다”는 기발한 제안을 내놓아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태는 해태가 KBO에 임의탈퇴 신청서를 넣고 선 감독이 직접 협상에 임하고 나서야 겨우 진정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인은 아들의 전면에서 퇴장, 보이지 않는 곳에서 뒷바라지를 하는 것으로 아버지의 소임을 다 했다. 선 감독은 아쉽게도 스프링 캠프로 인해 모친과 부친의 임종을 못했다. 1996년 주니치 드래건스로 진출했던 선 감독은 오키나와 스프링 캠프 도중 어머니 고(故) 김금덕 씨의 부음을 들었다.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귀국하려 했으나 부친이 만류했기 때문에 별세 소식을 듣고서야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아들이 일본에 가서 꼭 성공, 대한민국 국보투수의 명예를 높여야 된다고 생각해 귀국을 만류했던 고(故) 선판규 씨 역시 감독이 된 아들이 오키나와 캠프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영면했다. 선동렬 감독은 오키나와에 한국행 비행기편이 없어 11일 후쿠오카를 거쳐 귀국할 예정이다. 박승현 기자 nanga@osen.co.kr [Copyright ⓒ 한국 최고의 스포츠 전문 미디어 OSEN(www.ose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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