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은 홈런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해로 기록돼 있다. 마크 맥과이어(당시 오클랜드)가 49개로 신인 최다 홈런 신기록을 세우는 등 아메리칸리그와 내셔널리그 모두 한 시즌 최다 기록을 새로 썼고 와중에 오클랜드 등 9개 팀도 팀 신기록을 세웠다. 1987년 한 해 메이저리그에서 터져나온 터져나온 홈런 수는 모두 4458개로 3년 전인 1984년(3258개)보다 무려 37퍼센트가 늘었다. 1986년에 이어 2년 연속 홈런이 큰 폭으로 증가하자 투수들은 "공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고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구단 측이 관중 수입 증가를 노려 '장난'을 친 게 아니냐는 음모론이 횡행하자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조사에 나섰다. 리그 공인구로 사용되는 롤링스(Rawlings) 사의 공을 면밀히 검토한 사무국은 뜻밖의 결론에 도달했다. 중남미 국가인 아이티의 정정(政情) 변화가 홈런 수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당시 롤링스사는 메이저리그 구단에 납품하는 야구 공을 모두 아이티 현지 공장에서 임가공하고 있었다. 그 때만 해도 털실을 말아 가죽을 붙이고 그 위에 실을 꿰매는 제작 과정 거의 대부분이 수작업이었다. 몇 년씩 같은 일을 해온 숙련된 노동자들이 작업에 투입됐는데도 1987년엔 유독 108개 실땀의 도드라짐이 덜한 '밋밋한' 공들이 양산됐다. 원인을 곰곰이 짚어보던 메이저리그 사무국 관계자는 종신 대통령으로 15년째 아이티를 철권 통치하던 독재자 장 클로드 두발리에가 1986년 말 민중 봉기로 축출된 사실에 주목하게 됐다. 두발리에의 축출과 프랑스 망명으로 신바람이 난 노동자들이 바느질하는 손과 어깨에도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실밥을 평소보다 너무 세게 조여맨 것이다. 실밥이 밋밋하면 투수는 변화구를 던지기 쉽지 않고 반대로 타구는 공기 저항이 덜 해 더 멀리 날아갈 수밖에 없다. 황당한 소설 같지만 '롤링스-게이트' 또는 '행복한 아이티인 가설'으로 불렸던 이 얘기는 20년 전 실제로 있어났던 일이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지만 아이티의 정치 상황이 다시 혼돈 속으로 빠진 1988년엔 메이저리그의 홈런 수가 29퍼센트나 뚝 떨어져 더욱 심증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롤링스-게이트'는 신체 이외의 도구를 이용하는 종목 중에서도 야구가 얼마나 작은 변화에까지 민감한 지를 말해주는 사례다. 다음달 펼쳐지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사용될 공인구가 메이저리그 선수들에게 유리하다든지, 일본보다 한국 선수들에게 더 나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역시 롤링스사 제품인 WBC 공인구는 한국이나 일본 프로야구에서 사용되는 공과 겉가죽(한국은 말가죽, 미국은 소가죽)이 달라 매끄럽고 실밥의 도드라짐이 덜해 상대적으로 투수들이 애를 먹을 것으로 보인다. 1라운드 한국전 선발이 유력한 와타나베 슌스케(롯데)가 "공이 손에서 미끄러진다"며 곤혹스러워 한 반면 후쿠오카에서 훈련을 시작한 한국 팀의 손민한(롯데)은 "캠프 때 받은 공인구는 커서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오늘 받은 공은 괜찮다"는 반응을 보였다. 투구수 제한과 손에 익지 않은 공인구 등 한국 대표팀에게 WBC는 이래저래 쉽지 않은 도전이다. 손민한과 박찬호 등 국내파와 해외파가 한데 뭉친 대표팀 투수들이 공인구에 최대한 적응해 일본과 대만 타자들을 멋지게 잡아내길 바랄 뿐이다. 이종민 기자 mini@osen.co.kr 롤링스사 제품인 WBC 공인구 [Copyright ⓒ 한국 최고의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OSEN(www.ose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