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박찬호, 왕정치-이치로 꺾고 '도쿄대첩'
OSEN 기자
발행 2006.03.05 22: 11

이보다 더 극적일 수는 없었다. 한 판으로 일본을 완전히 눌렀다고 할 순 없지만 이래저래 짜릿하고 후련한 한 판이었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개막 이후 가장 많은 4만 353명의 대관중이 운집한 도쿄돔에서 펼쳐진 5일 한-일전은 한국과 일본 야구 역사를 3시간에 압축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 같았다.
1936년 리그를 출범, 한국보다 46년이나 프로야구 역사가 빠른 일본은 '선배' 답게 경기 초중반을 주도하며 앞서나갔다. 일본은 한국인 메이저리거 투수중 최근 구위가 가장 좋은 김선우(콜로라도)를 상대로 1회 마쓰나카의 적시타, 2회 가와사키의 홈런으로 각각 한 점씩을 뽑으며 기세를 올렸다.
후발주자 한국은 역시 열심히 쫓아가는 쪽이었다. 5회 박진만의 안타와 이병규의 희생플라이로 2-1로 따라붙자 왕정치(오사다하루) 일본 감독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왕정치 감독의 불길한 예감은 가장 극적인 형태로 현실로 나타났다. 8회 1사 1루에서 타석에 들어선 이승엽이 일본 4번째 투수 이시이 히로토시의 5구째를 잡아당겨 우중간 관중석에 꽂아버린 것.
대만 출신인 왕정치는 현역 시절 통산 홈런 868개로 일본 프로야구는 물론 세계 프로야구 사상 최다 홈런 기록(비공인)울 보유하고 있는 일본 프로야구의 거대한 상징이다. 이번 WBC에서 아시아 정상을 넘어 '세계 정상'을 외치던 왕정치에게 비수를 꽂은 건 다름 아닌 이승엽이었다. 삼성 소속이던 지난 2003년 시즌 56호 홈런을 날려 왕정치 등 3명이 보유하고 있던 아시아 최다 홈런 기록을 36년만에 갈아치운 바로 그 이승엽이다.
이승엽의 역전 홈런으로 사색이 된 왕정치 감독이 벤치에 앉지도 못하고 서성이길 한참, 도쿄돔 그라운드에선 또한번 각본으로 짠 듯한 장면이 펼쳐졌다. 3-2로 한국이 앞선 9회말 일본의 마지막 공격 2사 주자 없는 가운데 박찬호와 이치로가 맞대결을 펼친 것.
한국이 낳은 최초의 메이저리거이자 빅리그 100승 투수인 박찬호와 일본 프로야구의 영웅으로 메이저리그 신인왕-MVP 동시 제패, 한 시즌 최다 안타 신기록 경신 등 신화를 써가고 있는 빅리그 사상 최고의 동양인 타자 이치로. 둘의 대결은 '야구의 세계화'를 부르짖으며 이번 대회를 성사시킨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일부러 만들어 내려고 해도 힘들었을, 한국과 일본 미국 3개국 야구 역사를 상징적으로 함축하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박찬호가 이겼다. 공 3개로. 빠른 공 3개로 이치로를 유격수 뜬 공을 잡아냈다. "30년 동안 상대가 이길 생각이 들지 못하도록 해주겠다"던 그 이치로를 박찬호가 잡아냈다. 40년 뒤처져 열심히 일본의 뒤를 쫓아온 한국의 선봉 박찬호는 일본 최고 이치로에게 지지 않았다.
승부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일본은 여전히 강하다. 당장 오는 12일부터 펼쳐지는 2라운드에서 4강 진출을 놓고 일본과 다시 한번 격돌해야 한다. 하지만 2라운드가 어찌 됐든 이날 승리는 값지고 의미있었다. '도쿄 대첩'이라 부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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