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의 투구수 제한은 철저하게 메이저리그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마련된 규정이다.
투수진이 풍부한 미국 대표팀에 유리하게 만든 장치라는 지적도 있지만 그보다는 메이저리그 시범경기 진도와 맞추려는 목적이 더 크다. 1라운드 65개-2라운드 80개-준결승 및 결승 95개로 제한을 점차 늘린 것 시범경기 초중반 투수들이 40~50개에서 시작해 갈수록 투구수를 늘려가는 상황을 WBC에서도 그대로 '재현'하려는 의도다.
같은 이유로 투구수뿐 아니라 선발 로테이션도 미국 대표팀은 돌발 상황이 생기지 않는 한 5일 로테이션을 지켜줄 것이다. 역시 대표로 차출된 선수와 소속 팀에 대한 약속과 배려다.
따라서 아시아라운드(A조) 1위로 2라운드에 진출한 한국의 첫 경기 상대는 B조 1위가 가장 유력한 미국이 되면서 선발 투수로 제이크 피비(25.샌디에이고)가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 피비는 8일(이하 한국시간) 멕시코와 B조 1라운드 첫 경기에 선발 등판이 확정된 상태여서 닷새 뒤인 13일 한국전에도 선발 등판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으로선 4강 진출을 위해선 미국보다는 일본과 재격돌, 그리고 멕시코 또는 캐나다로 예상되는 B조 2위 팀과 대결에 촛점을 맞춰야 한다. 하지만 첫 판인 미국전부터 기가 죽어버린다면 다음 경기도 장담할 수 없다. 승리보다는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낳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피비는 너무 강하다. 2년 전인 2004년 피비는 2.27로 내셔널리그는 물론 양 리그를 통틀어서 방어율 1위를 기록했다. 지난해는 2.88로 방어율은 조금 높아졌지만 탈삼진 216개로 내셔널리그 1위를 차지했다. 올해로 메이저리그 5년차에 불과하지만 미국 팀의 또다른 선발 요원 돈트렐 윌리스(플로리다)와 함께 가까운 장래에 사이영상을 손에 넣을 만한 최고의 투수가 피비다.
피비가 한국 팀에는 이래저래 불운한 만남이다. 피비는 오른손 투수지만 지난해 좌타자 상대 피안타율 .223, 우타자 상대 .212로 좌우를 가리지 않았다. 시속 96마일(154km)에 육박하는 포심 패스트볼과 함께 위력적인 체인지업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한국 타선을 이끄는 핵이 좌타자 이승엽이라는 점이 피비 앞에선 내세울 만한 게 못 된다.
최선을 다해도 한국 팀은 피비를 상대로 그리 많은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기회는 딱 한 번이나 두 번뿐일지도 모른다. 피비는 지난해 203이닝을 던지면서 투구수 3160개를 기록했다. 이닝당 15.56개로 호안 산타나나 그렉 매덕스 급은 아니지만 투구수도 잘 조절하는 편이다.
2라운드 투구수 제한이 80개인 만큼 산술적로 계산하면 피비가 6회 1사까지는 던진다고 예상할 수 있다. 메이저리그 경기와 달리 초반부터 투구수에 신경쓰고 적극적으로 승부하면 6회 이후까지 갈 수도 있겠지만 무리하지 않도록 미국 코칭스태프가 적당한 선에서 끊어줄 것이다.
피비의 지난해 이닝당 출루허용수(WHIP)는 불과 1.04로 메이저리그를 통틀어 5위를 기록했다. 한국 대표팀 타선이 메이저리그급으로 대분발한다 해도 피비가 6이닝을 던지는 동안 주자를 5~6명 정도 밖에 내보내지 못한다는 계산이다. 대단한 집중력과 팀 배팅, 벤치의 적극적인 작전이 최상의 조합을 이루지 않고는 피비를 깨기는 힘들어 보인다.
한국 팀에서 유일하게 피비를 상대해 본 선수는 최희섭(LA 다저스)이다. 최희섭의 피비 상대 통산 성적은 9타수 1안타(2루타) 2탈삼진, 타율 .111로 처참하다. 어딜 봐도 실력으로만 본다면 피비와 대결은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한국 팀엔 이래저래 운도 별로 따르지 않는다. 피비는 최근 3년간 야간경기 방어율이 2.90이었던 반면 주간 경기에선 3.90을 기록했다. 13일 애너하임 에인절스타디움에서 펼쳐질 것으로 보이는 한국-미국전은 저녁 8시에 시작되는 야간경기다.
메이저리그 최강의 투수를 상대하니 확률은 당연히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피비 뒤에는 브래드 리지(휴스턴)와 조 네이선(미네소타) 채드 코데로(워싱턴) 토드 존스(플로리다) 휴스턴 스트릿(오클랜드) 브라이언 푸엔테스(콜로라도) 등 지난해 합쳐서 무려 234세이브를 따낸 '마무리 6총사'가 버티고 있다.
돈트렐 윌리스나 로저 클레멘스를 만난다고 행운일 리 없지만 제이크 피비는 일본을 꺾고 아시아 1위로 기세 좋게 2라운드에 진출한 한국 대표팀에게 첫 판부터 혹독한 시련이 될 것 같다. 4강 진출로 병역 혜택을 꿈꾸는 선수들이나 메이저리그 진출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이승엽이나 피비의 미국은 궁극적인 시험대다.
■WBC 2라운드 한국 일정
13일 오후 1시=B조 1위 팀
14일 낮 12시=B조 2위 팀
16일 낮 12시=일본
*한국시간, 장소는 모두 에인절 스타디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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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수 중 유일하게 피비와 상대해 본 최희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