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현(27.콜로라도)이 지난 1999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리그에 성공적으로 데뷔하자 미국 야구 관계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아시아에서 온 작은 체구의 투수가 프리즈비 슬라이더와 업슛 등 마구에 가까운 공을 뿌려대는 모습에 경탄하면서 한편으론 '멸종' 위기에 다다랐던 잠수함 투수의 부활에 잊었던 자신들의 뿌리를 더듬는 이들이 많았다. 잠수함 투수는 바로 메이저리그의 모태이기 때문이다.
1846년 알렉산더 카트라이트가 처음 만든 야구 규칙엔 '투수는 공을 허리 위로 던져서는(throw) 안 되고 아래로 던져야(pitch)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당시 throw, pitch의 의미는 현대 야구와 달랐다). 카트라이트의 규칙엔 심지어 투수가 던질 때 '손목을 틀면 안 된다'는 조항까지 있었다.
당연히 미국 야구 초창기 투수는 모두 언더핸드나 사이드암 등 이른바 잠수함일 수 밖에 없었다. '허리 아래' 조항은 1872년 폐지됐지만 이후로도 사이드암이나 언더핸드로 던지는 투수들은 끊이지 않았다. 417승으로 사이 영에 이어 통산 승수 2위인 '빅 트레인' 월터 존슨이 1927년까지 사이드암으로도 불같은 강속구를 뿌렸고 언더핸드인 칼 메이스(선수 생활 1915~1929년)도 1920년 타자의 머리를 맞혀 사망케 하는 불상사를 빚을 만큼 빠른 공을 던졌다(당시 타자들은 헬멧을 쓰지 않았다).
테드 애버내티(1955~1972년)가 어깨 부상으로 정통파에서 잠수함으로 변신한 뒤 1960년대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이름을 날린 이래 켄트 테컬브(1974~1989년)와 댄 퀴젠베리(1979~1990년) 등 걸출한 잠수함 소방수들이 줄줄이 배출됐다. 하지만 로저 클레멘스처럼 강속구와 각도 큰 떨어지는 변화구를 구사하는 오버핸드 정통파 투수들이 갈수록 위세를 떨치면서 1990년대 이후 잠수함 투수들은 빅리그에서 명맥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 참에 김병현의 출현은 미국 야구팬들에게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한국 대표팀이 오는 13일 애너하임 에인절 스타디움에서 펼칠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2라운드 첫 경기 상대는 현재로선 미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 김인식 감독이 2라운드 투수 운용 구상을 어떻게 짜는가에 따라 변수가 있지만 이날 경기엔 김병현과 함께 정대현 두 잠수함 투수 중 한 명이나 둘 다 투입될 가능성이 있다. 야구의 본고장이자 잠수함 투수의 모태인 미국을 상대로 '한국형 잠수함'이 출격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흥미롭다.
정대현은 경희대 재학중이던 지난 2000년 시드니올림픽 미국과 예선전에서 7이닝 6피안타 무실점의 깜짝 호투를 한 데 이어 준결승에서 다시 만난 미국을 상대로도 6⅓이닝 2실점으로 호투, 미국을 경악케 했다. 잠수함 투수의 공이 그만큼 미국 타자들의 눈에 생소했기 때문이지만 23살 정대현의 대담한 투구는 두고두고 평가받을 만하다.
경험 면에선 아직 부족한 정대현을 김인식 감독이 미국전 선발 카드로 뽑아들 지는 지켜볼 일이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정대현은 미국전에 중용될 것으로 보인다. 정대현으로 안 된다면 메이저리그에서 7년간 산전수전 다 겪으며 86세이브 36승을 따낸 김병현이 뒤를 받쳐줄 것이다. 다만 한국이 사흘 뒤인 16일 일본과 재격돌에 다시 한번 촛점을 맞춰야할 상황이라 미국과 첫 판에서 김병현을 3일간 등판이 불가능한 투구수 50개 이상으로 '소진'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을 이긴다는 건 현재로선 상상하긴 힘들지만 미국과 경기 중반까지라도 접전을 펼친다면 한국 야구사에 오래 남을 사건이 될 것이다. 김병현과 정대현이 미국 타자들을 상대로 호투한다면 TV를 통해 이를 지켜볼 수천만 명의 미국 야구팬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길 것이 분명하다.
김병현은 1라운드 지난 3일 대만전서 선발 서재응에 이어 1⅔이닝 1피안타 1탈삼진 무실점으로, 정대현은 4일 중국전에서 1이닝을 탈삼진 2개 등 삼자범퇴로 막아 2라운드를 앞두고 실전 점검을 마친 상태다.
한국 대표팀의 잠수함 듀오 김병현과 정대현이 야구의 본고장 미국에서 미국을 상대로 한국형 잠수함의 매운 맛을 보여줄 수 있을까. 미국은 막강하지만 야구 공은 둥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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