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1년 이치로의 메이저리그 데뷔를 현장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건 기자에게도 행운이었다.
2001년 2월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인근 피오리아의 시애틀 매리너스 캠프는 밀려든 동양인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일본 야구의 영웅 이치로의 메이저리그 입성을 취재하기 위해 몰려든 일본 취재진이 족히 60~70명은 돼보였다.
그 중엔 1964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동양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경기에 출장했던 무라카미 마사노리씨도 있었다. TV 해설가로 활동 중이던 무라카미씨가 타자로는 일본인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도전장을 내민 이치로가 "빅리그에서도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며 "한국 야구 팬들도 함께 지켜봐달라"고 당부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치로는 메이저리그 공식경기에 출장하기 전부터 화제를 몰고다녔다. 그중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이치로를 밀착 취재하던 일본 기자 중 한 명이 인터뷰 도중 루 피넬라 당시 시애틀 감독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치로가 어제는 프리배팅을 124개 했는데 오늘은 118번 밖에 안 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피넬라 감독과 미국 기자들은 박장대소했지만 일본 기자들은 엄숙했다. 그들의 얼굴에선 '닛폰(일본) 최고'가 '세계 최고'가 될 것이라는 확신 어린 비장감마저 느껴졌다. 일본인 특유의 진지함, 섬세함에 대한 집착은 같은 동양인인 한국 기자에게도 낯설게 다가왔다.
그 모든 낯설음과 웃음, 의문을 잠재운 건 이치로였다. 이치로는 데뷔 첫 해인 2001년 타율 3할5푼에 242안타 56도루를 기록하며 신인왕과 MVP를 동시에 제패하더니 2004년엔 84년이나 깨지지 않던 한 시즌 최다 안타 메이저리그 기록을 갈아치웠고 지난해까지 5년 연속 3할 타율-200안타를 달려왔다. 이제 이치로에게 물음표를 달거나, 이치로를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일본 기자들을 비웃는 이들은 미국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5년 전인 2001년 미일 양국의 비상한 관심 속에 태평양을 건넌 뒤 엄청난 성공을 일궈냈던 이치로가 지난 6일 다시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메이저리그 진출 후 해마다 반복돼온 일이지만 이번 미국행은 또 한번 대단한 주목을 받고 있다. 그 상당 부분은 이치로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일본 대표팀 주장을 맡아 왕정치 감독과 함께 "아시아 정상을 넘어 세계 정상"을 외쳤던 이치로는 지난 5일 한국전 역전패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다. 일본 선수들의 자신감을 북돋게 하려는 뜻이었겠지만 "상대가 30년 동안 이길 생각이 들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발언은 한국전 패배 후 조롱거리가 돼버렸다.
미국에서 펼쳐질 WBC 2라운드는 이치로와 일본엔 더는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이다. 아시아 정상을 큰소리쳤으니 한국에 설욕해야 하고 세계 정상을 외쳤으니 최강 미국을 꺾어야 한다. 이치로는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을까.
mini@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