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치에서 유머를 빼 놓으면 뼈대가 흔들린다. 백악관에는 아예 유머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보좌관이 있다. 비즈니스에서도 마찬가지다. 리더십을 연구하고 적용하는 사람들은 유머를 필수 요소로 여기고 있다. 사업가들은 좌중을 휘어잡는 웅변술을 갖추기 위해 유머를 따로 공부하기도 한다.
유머의 정치학, 유머의 경제학이 드라마에도 적용되고 있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대표적인 드라마들은 ‘유머의 리더십’을 철저히 따르고 있다.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연설을 하는 이가 제작자들이라면 그들이 쓰는 화술(대본)에는 곳곳에 유머가 가득하다.
표민수 PD의 ‘넌 어느 별에서 왔니’(정유경 극본, MBC TV)는 드라마 속에 끝없이 이어지는 유머 장치를 심어 놓았다. 마치 ‘웃기지 않으면 감동도 없다’는 방정식을 따르는 느낌이다. 한 없이 진지할 때 맥없이 웃기고, 마구 웃기다가 핑 하니 눈물짓게 만드는 이런 기법은 이미 표민수 PD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지난 달 27일 방영된 5회 차의 한 장면이다. 새 구두를 신은 복실(정려원)의 발뒤꿈치가 까졌다. 승희(김래원)가 연고와 밴드를 사와서 발뒤꿈치를 치료 해준다. 갑자기 애틋한 감정이 피어 오른 복실은 유리구두를 신겨주는 왕자와 신데렐라가 된 상상에 빠져 들었다. 깨기 싫은 달콤한 상상이다. 이윽고 승희의 채근하는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 왔고 그 때 승희가 던진 '깨는' 말, “무슨 여자 발이 곰 발바닥 같냐, 그리고 너 발톱 좀 깎고 다녀”, 뭐 이런 식이다.
또, 복실이 승희에게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답을 기다리는 데 뜬금없이 ‘대출광고’ 메시지가 불쑥 뛰어 나온다. 보는 이를 피식 웃게 만들면서도 개연성을 공감하는 설정이다.
SBS TV 월화 미니시리즈 ‘연애시대’(박연선 극본, 한지승 연출)의 유머 장치 또한 에너지가 넘친다. ‘넌 어느 별에서 왔니’가 가벼운 유머라면 ‘연애시대’는 웃음 폭탄에 가깝다. ‘헤어지고 시작된 이상한 연애’라는 모토를 따르다 보니 이야기를 잇는 플롯이 해프닝 위주로 짜여질 수밖에 없다. 그렇긴 하더라도 그 웃음의 강도는 보통 수준을 뛰어 넘는다.
예를 들면, 산부인과 의사인 공준표는 산모가 지르는 비명소리에 먼저 기절하는 출산공포증을 앓고 있다. 나중에 출산공포증에 걸린 사연이 설명되겠지만 일단은 설정 자체가 유머 덩어리다. 북마스터 이동진에게 심하게 무안을 당한 변태작자가 자동차를 거칠게 몰아 이동진에게 돌진하는 장면이 있다. 큰 사고를 예상했지만 변태작자의 보복은 놀란 이동진이 기껏 햄버거를 깔고 앉게 만드는 것이었다.
1, 2회가 방송된 MBC TV ‘Dr. 깽’(김규완 극본, 박성수 연출)에도 웃음 코드는 지천으로 널려 있다.
고교생인 한가인과 양동근이 처음 만나는 장면. 양동근이 불량한 친구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고 있을 때 원더우먼처럼 나타난 한가인이 기지를 발휘해 친구들을 쫓는다. 한숨을 돌린 뒤 한가인이 양동근의 다친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꺼내든 치료제는 다름 아닌 여성 생리대다.
의사인 한가인이 교통사고가 난 국회의원을 먼저 돌보지 않은 괘씸죄에 걸렸다. 내키지 않았지만 병원 간부의 강권으로 억지 사과를 하는 자리에서 극중 검사인 이종혁과 첫 대면을 한다. 이종혁은 여의사와 국회의원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에도 아랑곳 않고 오로지 한가인의 입술에 묻은 고추장에만 신경을 쓴다. 참다 못해 한가인을 보고 “저, 입에 고추장 묻었어요”라고 내뱉고는 줄행랑 치는 모습이 영락없는 코미디의 한 장면이다.
진지한 드라마에서조차 웃음 코드가 만발한 데는 사회적 배경과 연관이 있다. 정치 사회적 암흑기의 우리 드라마는 한없이 진지하거나, 한없이 가벼운 두 종류 밖에 없었다. 진지할 때 진지하지 못함은 시대 착오로 받아들여지는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진지한 상황에서도 가벼움을 찾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됐다.
가벼운 사회로의 전환은 드라마 속 유머 장치로 적용됐다. 웃음과 유머는 결국 여유로움이다. 친구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춤을 배우고 노래를 배우고, 유머를 익히는 젊은 세대이다. 이들을 감동시키기 위해 눈물과 직접적인 웅변을 들이대서는 어림도 없다. 유머와 간접적인 이미지만이 그들에게 느낌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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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부터 ‘연애시대’의 손예진, ‘Dr. 깽’의 한가인, ‘넌 어느 별에서 왔니’의 정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