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옥, 큰 별은 졌어도 대작이 남았다
OSEN 기자
발행 2006.04.12 09: 59

[OSEN=손남원 영화전문기자]2006년 4월11일 오후 11시39분, 한국 영화계의 큰 별이 떨어졌다. 신상옥, 향년 80세.
지금의 40대에게조차 그의 이미지는 짧고 단편적인 기억들로 이어진다. 반공세대로 자란 그들에게 1978년 ‘신상옥-최은희 부부, 북한 피랍’ 보도는 단지 북한의 만행에 치를 떨게하는 사건일뿐, 한국 영화계의 대들보 감독과 최고 인기 여배우가 사라진 아쉬움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이미 문희, 남정임, 윤정희 트로이카로 핀업걸의 바통이 넘겨진 후. 그럼에도 그들은 코흘리개 시절, 신상옥 감독의 항공 영화 ‘빨간 마후라’ 주제가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부르며 골목길을 주름잡았다.
설사 세월이 그의 이름을 바래게했을지언정 장년층 올드팬들은 아직도 신상옥을 온몸으로 기억하고 느낀다. 그가 남긴 주옥같은 명화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젊은 그들’ ‘로맨스 빠빠’ ‘연산군’ ‘강화도령’ 등을 극장 앞에 길게 줄서서 기다리다 보고 감동받은 세대들이니까.
신상옥은 1925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고 일본 도쿄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일제시대에 동경 유학을 했고 그것도 미술전문학교를 다녔으니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감독 데뷔는 1952년 ‘악야’. 건달들이 영화 배급과 제작을 움켜쥐면서 인기 감독과 배우들을 들들 볶던 그 당시에 그는 작품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갖춘 영화들을 쏟아냈다. 생애 100번째 작품 ‘천년학’을 찍고 있는 임권택 감독이 무색할 정도로 스피드한 세상이었다. 인기 감독에게는 무제한 기회가 보장됐던 50, 60년대에 그는 대표작 수십편을 찍었으니까.
영화광 김정일이 탐을 냈다던 그의 자질은 결국 피랍으로 이어졌다. 최은희와의 홍콩 방문 중에 납북된 그는 두 번씩이나 탈출을 시도했다가 붙잡히는 고초를 겪었다. 그 시기에도 그의 영화 제작은 쉼없이 이어져 '돌아오지 않는 밀사' '소금' 등을 만들었다.
1986년 그는 다시 한번 한국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세게 받았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서방세계로의 복귀에 성공한 것이다. 이후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부부는 함께 영화, 연극 작업을 했고 신상옥은 대학 강단에 서고 저술 작업에도 정성을 쏟았다.
이제는 한국 영화의 해외영화제 진출과 수상이 잦아졌지만 해외에서 가장 먼저 인정받은 인물이 바로 신상옥이다. 94년 제47회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것을 시작으로 그의 61년작 ‘상록수’는 한국 영화사상 처음으로 2003년 56회 칸 영화제 회고전에 초대됐다.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던 2004년 2월 그는 C형 간염으로 간 이식 수술을 받은 이후 지병으로 고생했다. 1966년 신 필름을 설립해 영세하던 영화 시장의 기업화를 꾀했던 그로서는 이제 스튜디오 체제에 진입한 한국영화의 발전을 지켜보고 눈은 감은게 행운이었던 셈이다.
일제시대 태어나 서울에서 경성중학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 귀국후 영화 감독으로 나서 대성공을 거두고는 당대 최고의 인기 여배우와 결혼. 북한 피랍후 몇 번의 탈출 시도 끝에 한국 귀환, 그리고 다시 정부와의 마찰로 미국행. 그리고 다시 영화계로 복귀한 말년 생활 등 신상옥은 삶 자체로 대작 한편을 남기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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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옥이 감독한 1960년 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그의 아내인 최은희가 주연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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