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정을 둘러싼 '테크놀러지'와 '전통'의 충돌
OSEN 기자
발행 2006.04.23 09: 36

"야구는 인간이 하는 경기다. 인간은 실수를 한다. 그래서 실수도 야구의 일부분이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메이저리그에 전해져 내려오는 통념이다. 선수든 감독이든 심판이든 무수히 많은 실수를 한다. 그래서 야구는 흥미롭고 때로는 '안타까운' 경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학의 발전에 따라 야구장에도 테크놀로지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지난 1920년 클리블랜드의 유격수 레이 채프먼이 빈볼에 머리를 맞아 사망한 뒤 30년이 흐른 1950년대에 타자 머리 보호용 헬멧이 등장한 이후 야구관련 장비는 진화했다.
그보다 훨씬 앞선 1907년에는 포수 정강이 보호대가 개발돼 선수 부상방지에 일익을 담당했다.
선수 보호용 도구가 '아날로그'식 장비라면 '디지털 기술'이 야구장에 본격적으로 선을 뵌 것은 1990년대부터다. 포수 마스크에 TV 카메라를 부착해서 투수의 구질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캐처캠'이란 별칭이 붙은 카메라가 올스타전 같은 이벤트 경기에 나타나면서 시청자들은 안방에서 생생한 화면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이에 앞서 심판들의 마스크에 카메라를 부착하려는 방송국의 시도가 있었지만 요즘 '엄파이어캠'을 통한 투구는 구경하기 어렵다. 경기를 진행하는 심판들이 "경기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다"며 반발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사례가 한국에서도 벌어졌다. 지난 8일 삼성과 롯데의 대구 개막전 경기를 중계한 한 방송국은 경기 시작 수 시간 전 "자체 제작한 특수 카메라를 심판들의 마스크에 부착해서 보다 생생한 화면을 시청자들에게 전하겠다"고 KBO측에 제의했다.
그러나 심판들은 "사전 통보도 없이 경기 당일 갑자기 마스크에 카메라를 달겠다고 하면 어쩌느냐"며 반발했다. 사태가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김호인 심판위원장이 부랴부랴 대구까지 내려가서 방송국측과 의견을 주고 받는 일까지 벌어졌다.
심판들이 반발한 이유는 단순했다. "신경이 쓰여 경기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카메라를 부착하고 주심을 맡은 오석환 D조 팀장은 "우선 시야가 가려지더라. 전방시야는 괜찮았지만 마스크 좌우에 부착된 카메라 배터리로 인해 좌우 스트라이크를 판정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그는 여기에 덧붙여 "카메라를 부착하고 떼는 데 시간이 걸려 동료 마스크를 쓰고 심판을 봤다. 무거운 카메라를 머리에 얹은 데다 맞지도 않는 마스크를 쓰다 보니 무척이나 불편했다"고 애로를 털어놨다.
이상일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 대행은 보다 구체적인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당시 주심 카메라를 통해 촬영된 화면을 보니 스트라이크와 볼 자체가 너무 확연하더라. 심판도 사람인 이상 실수를 할 수 있는데 큰 시비 거리에 휘말리지나 않을까 걱정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 때문에 심판 교육용이나 올스타전 같은 경기에서는 상관 없겠지만 정규시즌에서 쓰기에는 무리가 있는 게 사실"이라며 "미국도 페넌트레이스 때는 이런 일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결국 이 대행의 중재 하에 방송국과 심판진은 1회말까지만 카메라를 부착한 뒤 떼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이후 '엄파이어캠'은 중계화면에서 자취를 감췄다.
'테크놀러지와 인간'의 대립은 이제 야구장에서 흔한 일이 됐다. 미국만 해도 심판의 판정을 컴퓨터로 판독해 판정의 정확도를 수치로 나타내는 '퀘스텍'의 출현 이후 심판들이 곤경에 빠진 사례가 있다. 지난 2003년부터 메이저리그 구장에 도입된 퀘스텍 시스템의 영향으로 심판들의 스트라이크존이 바뀌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좌우에 민감하고 상하에 후한 퀘스텍의 존에 따라 심판들이 스트라이크존을 변화시키면서 투수들이 적응하는 데 애를 먹기도 했다. 다혈질로 유명한 커트 실링(보스턴 레드삭스)은 경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자 "퀘스텍 때문에 망쳤다"며 경기장에 설치된 퀘스텍 시스템을 부숴버린 일도 있었다.
지난 21일 대전에서 만난 한 심판의 설명은 한국에서도 신기술의 도입과 정착이 쉽지만은 않다는 점을 암시해준다.
"방송국의 입장도 이해는 된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으로 야구열기가 고조됐는데 협조를 해야 하는 것도 맞다. 야구붐이 일어난다는 데 우리가 싫어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선 일하기에 매우 불편한 게 사실이다. 오심을 방지하고 정확한 판정을 위해 노력하는 것만도 현재로선 벅차다. 그런데 경기운영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는 카메라까지 부착하라는 것은 한국적 현실에서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다".
workhorse@osen.co.kr
마스크에 카메라 부착을 경험한 오석환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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