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승’에서 ‘개혁가’로 거듭난 신돈
OSEN 기자
발행 2006.05.08 12: 56

과거의 기록인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후세의 몫이다. 과거의 좋았던 일들은 후세에서는 혹평을 받을 수도 있고, 역사속의 인물이 재평가되기도 한다. 지난해 9월부터 7개월동안 방송된 MBC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 ‘신돈’ 또한 역사를 재해석하고 재평가한 사례 중 하나다.
어린시절에 봤던 그림으로 된 한 역사이야기에서 신돈은 공민왕의 두터운 신임을 근거로 마구잡이로 행동한 망나니에 불구했다. 특히 신돈이 세웠던 전민변정도감이라는 기관은 설립 의도는 좋았으나 결국에는 신돈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기관으로 전락했다는 내용이었고, 그로 인해 신돈이 축출됐다는 내용이었다. ‘역시 천민 출신답다’는 말이 어울리는 스토리였다.
하지만 MBC 드라마 ‘신돈’에서 그려진 신돈의 모습은 어린 시절 봤던 역사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내용이었다. 신돈이 공민왕이 총애를 받은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지만 신돈의 행적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모습이 아닌 원의 지배를 벗어나 강한 고려를 세우려는 개혁가의 그것 이었다.
‘신돈’은 세계를 호령했던 원나라의 세력이 약해질 무렵의 고려 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원의 속국과 다름없었던 고려의 31대 왕인 된 공민왕은 고려의 자립을 꿈꾼다. 권신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은 원에서 만났던 천민 출신 편조(훗날 공민왕으로부터 ‘신돈’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음)를 등용해 고려의 개혁을 실현하려 했다.
공민왕이 편조를 등용했던 이유는 바로 편조가 천민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공민왕은 천민 출신인 편조로부터 권신들에 의해 가려져 있던 고려의 실상을 낫낫이 듣게 되고 부조리함을 없애는 일선에 편조를 기용한 것이다.
역사에서도 신돈의 개혁정치가 초반에는 고려 백성들의 호응을 얻었다. 전민변정도감을 통해 권세에 빼앗긴 토지를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주고 양민에서 노비로 전락한 자들을 원래 신분으로 회복시켜 백성들의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이런 신돈의 개혁이 시간이 흐를수록 빛을 잃어간 이유에 대해 역사는 신돈이 오만해지고 방탕과 음란을 일삼았고, 천도를 주장하다 왕의 불신을 받고 역모를 꾀하려다 처형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드라마 ‘신돈’에서 편조는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을 슬퍼하며 대규모 영전공사를 진행하려는 공민왕과 갈등을 빚게 된다. 편조는 고려의 진취적 기상을 떨치기 위해 서경천도와 요동정벌을 주장하지만 권신들에게 휩쓸린 공민왕은 편조가 역모를 계획하는 것으로 의심한다. 강한 고려의 모습을 꿈꿨지만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으로 인해 갈등이 시작된 공민왕과 편조는 결국 서로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개혁을 꿈꿨던 두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약점 하나가 존재했다. ‘신돈’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느꼈던 ‘신돈의 개혁이 조금만 온건했다면?’ 혹은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을 빨리 털어냈다면?’ 이라는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신돈이 급진적이지 않고 조금 더 신중한 모습이었고 공민왕이 심약한 모습이 아닌 노국대장공주의 뜻을 기려 정사에 매진했다면 고려의 마지막 모습은 역사와는 사뭇 다르게 나타났을 것이다.
공민왕과 신돈의 개혁이 실패하자 고려의 국력은 극도로 쇠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고려의 역사가 끝나고 이성계에 의해 조선이라는 이름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된 것이다.
신돈이라는 인물이 역사가 기록한대로 요승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요승이었을지는 몰라도 신돈이 전민변정도감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모습은 당시의 유토피아였을 것이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개혁이었다 하더라도 신돈의 개혁이 성공했다면 분명 우리의 역사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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