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로스앤젤레스, 김형태 특파원] 특정 경기 중계권으로만 3조 원 이상을 지불하는 방송국이 있다고 치자. 천문학적인 금액을 지불하는 방송국과 이 돈을 '받아내는' 리그 가운데 어느 쪽 입김이 더 셀까.
'물주가 왕'이라는 속설에 비춰보면 방송국이 주도권을 가질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방송국의 카운터파트가 미국 프로미식축구를 관장하는 NFL이라면 '리그가 왕'이다.
지난 2005년 말 NFL이 미국 4대 TV 네트워크 중 하나인 NBC와 체결한 6년 계약이 새삼 화제를 끌고 있다.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엄청난 금액을 내놓고 경기를 중계하는 방송국의 광고 편성 내용을 두고 '외압'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NFL은 자신들과 중계권 계약을 맺은 모든 방송국에 대해 한 가지 '제한조치'를 분명히 하고 있다. 미식축구(풋볼) 경기 중계 도중 카지노 광고를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남녀노소 모두가 즐기는 풋볼 경기에 '도박 광고'를 할 수 없다는 것으로 리그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차원이다. 정규시즌 경기는 물론 엄청난 액수의 광고료가 붙는 슈퍼볼에서도 이 원칙은 통용된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NFL이 이 같은 '도박 광고 금지 조항'을 두고 NBC 측과 마찰을 빚어 관심을 모은다. NBC는 올해부터 2011년까지 '선데이나잇 풋볼'을 중계하는 대가로 무려 36억 달러(약 3조 3000 억 원)를 지불한다. 이 대가로 1주일에 한 경기씩 정규시즌 16∼18경기와 플레이오프 2∼3 경기, 그리고 2008년과 2011년 슈퍼볼 중계권을 확보했다.
NFL이 남의 방송국 일에 개입한 이유는 NBC가 인기리에 방송하는 한 드라마 때문. NBC는 카지노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드라마 '라스베이거스'를 방영하고 있는데 풋볼 중계 도중에는 이 드라마의 광고는 물론 아나운서의 멘트를 통한 홍보도 할 수 없다는 게 NFL측의 입장이다.
배우 제임스 칸과 조시 더해멀이 주인공을 맡고 있는 라스베이거스는 카지노의 경비 담당 요원의 활약상을 그린 드라마로 도박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 NBC도 배경이 카지노일 뿐 도박이 주제가 아니다고 볼멘 소리를 한다.
그러나 NFL측은 강경하다. 모든 도박 관련 이벤트 및 행사에 대해 홍보 금지 원칙이 정해져 있는 만큼 드라마 라스베이거스 역시 이를 따라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만약 원칙을 어길 경우 다음 중계권 재계약 협상 때 불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점도 암시했다.
그러자 고개를 숙인 쪽은 NBC다. 지난 1998년 NFL 중계권을 라이벌 CBS에 빼앗긴 뒤 시청률에 큰 타격을 입은 바 있는 NBC는 고심 끝에 라스베이거스 홍보방송을 하지 않기로 했다. 천문학적인 금액의 중계료를 납부하면서도 미식축구 중계 시간에는 자사 프로그램을 선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NFL측의 이 같은 조치에 대해 일각에선 '거만하고 뻣뻣한 자세'라는 비판이 있다. 카지노 광고 금지야 당연하지만 카지노를 무대로 전개되는 인간 드라마까지 선전할 수 없다는 건 너무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하지만 NFL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경기의 순수성 보호와 풋볼에 열광하는 젊은 팬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면 이는 당연한 조치라는 반응이다.
스포츠 및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는 '킬러 컨텐츠'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유저들에게 큰 파급력이 있는 컨텐츠를 제작하는 곳이라면 시장을 지배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런 점에서 '미국 스포츠 시장의 패권자'인 NFL은 느긋하다. '풋볼을 보고 싶어하는 팬은 널렸고 경기를 중계하고자 하는 방송국도 많다. 우리는 원칙을 세워갈 뿐'이라는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방송사의 광고 편성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영향력이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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