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출신 영화인이 늘고 있다. 배우에서 제작자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왜 개그맨들이 본업을 떠나서 낯선 분야인 영화 쪽으로 가는걸까. 영화배우나 탤런트, MC 등에 비해 개그맨의 방송 수명이 워낙 짧은 때문이다. 인기 사이클도 몇 년 주기가 아니고 빠르면 몇 주 단위로 돌아간다. 1980년대까지 명맥을 유지하던 코미디 전문프로들은 거의 사라졌다. 현재는 스탠딩 개그 스타일로 진행되는 '개그 콘서트'와 '개그야', '웃찾사' 등이 고작이다. 청소년과 젊은이 감각에 맞도록 라이브 콘서트 식의 진행이다. 5~10분 가량의 짧은 코너들을 숨가쁘게 돌리며 반응이 좋지않은 코너는 금세 사라진다. 중견 코미디언들이 끼어들 틈새를 찾아보기 힘들다. 생존 경쟁이 치열한 대신에 한번 유행어와 유행 동작을 만들어내면 순식간에 인기 스타로 뜬다. 그러나 ‘갈갈이’ 박 준형이나 ‘컬투’의 정찬우 김태균 처럼 계속해서 히트 레퍼토리를 발표해야만 고정 팬을 확보하고 안정된 방송 출연을 기약할수 있다. 80년대까지 각 방송국은 주말 프라임 타임에 코미디 프로를 방송했고, 일일 드라마 형식으로 매일 코미디언들을 출연시켰다. 이른바 코미디언의 전성 시대였고 구봉서, 배삼룡, 이기동 등 1세대에 이어 전유성, 고영수 등 2세대 원로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코미디, 개그계를 통털어 방송에서 활약하는 원로는 커녕, 40대 중견 조차 찾기 어렵다. 웃음을 유발하는 시트콤 프로에서조차 PD들은 코미디언 기용을 꺼린다. 대신 기존 이미지를 깨고 코믹 연기에 도전하는 이순재 오지명 노주현 나문희 등이 스타로 재탄생했다. 80~90년대 인기 코미디언, 개그맨들 일부는 영화계로 떠났다. 대표적인 인물이 영화제작자로 활동중인 심형래 영구아트 대표다. 아동용 영화 ‘영구’ 시리즈로 충무로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이후 SF물 제작에 전념했다. ‘용가리’로 1999년 신지식인에 뽑혔고, 지금은 블록버스터 ‘디 워’ 개봉을 앞두고 있다. 서세원도 일찌감치 영화 제작에 뛰어들어 ‘납자루떼’(1986년)로 쓴 맛을 봤다가 2001년 ‘조폭 마누라’에 이르러서야 흥행 성공을 맛봤다. 이후 ‘긴급조치 19호’ ‘4발가락’ ‘도마 안중근’ 등 후속작의 저조로 고전하는 중. 이경규도 1992년 ‘복수혈전’의 기획, 감독, 각본까지 맡아 총력을 기울였다가 실패한 뒤 MC로 완전히 방향을 틀었지만 '복면달호' 제작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배우로서는 임하룡이 가장 모범적인 성공 사례다. 올해 52살인 그는 80년대 ‘유머 1번지’와 ‘쇼 비디오자키’ 등 코미디 프로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코미디 프로가 쇠퇴하는 현장을 쓸쓸이 지켜보던 그는 1998년 ‘엑스트라’의 특별출연을 시작으로 배역을 가리지않고 영화 연기를 배우는데 전념했다. 2003년 ‘그녀를 믿지마세요’의 파출소장, 다음해 ‘범죄의 재구성’에서 부동산 사기꾼 서사장으로 인정을 받기시작하더니 2005년 ‘웰컴 투 동막골’의 인민군 하사 역으로 관객들 뇌리에 영화배우 임하룡을 확실히 새겼다. 지난해 ‘맨발의 기봉이’와 ‘원탁의 천사’ 등에서 주연급으로 올라섰고, 올해 한국영화 위기론 속에서도 출연작을 늘려가고 있다. 임하룡이 밝히는 영화배우 전업 이유는 간단하다. “코미디언으로 설 땅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며 “영화 제작은 겁이 나서 못하겠고, 인내를 갖고 기다려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고 말했다. 코미디언의 영화 진출, 단단한 문을 깨부수고 들어간 중견 배우의 성공 해답은 결국 노력이었다. mcgwire@ose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