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가 없어요. 야구를 했지만 이런 게임은 처음입니다”. 전남 화순고 이동석(43) 야구부 감독은 승부가 결딴난 찰나를 돌이키며 긴 한숨 속에 허탈감을 애써 추스리며 경기장을 벗어났다. 광복절인 8월15일. 제 37회 봉황기 전국고교야구대회 2회전에서 화순고는 순천 효천고에 9회말 2사까지 3-1로 앞서 있다가 한 순간에 무너지고 거짓말같은 3-4 역전패를 당했다. 청소년대표로 믿었던 김선빈이 2사만루에서 효천고 1년생 주도성에게 3타점 싹쓸이 끝내기 안타를 얻어맞은 것이다. 승부야 그럴 수 있다하더라도, 이동석 감독으로선 겹겹이 둘러싸인 어려운 환경을 뚫고 피땀흘리며 헤쳐나온 그 과정이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이동석 감독은 1988년 4월17일 빙그레 이글스(한화 이글스 전신) 유니폼을 입고 광주 무등구장에서 당시 무적을 자랑하던 해태 타이거스전에서, 게다가 선발 맞상대였던 당대 최고투수 선동렬과 당당히 맞서 노히트노런(무안타 무득점)의 대기록(1-0승)을 일궈낸 주인공이었다. 군산상고, 동국대를 나온 이 감독은 그 해 노히트노런 포함 7승3패2세이브를 거두며 빙그레 주축 투수로 활약했지만 그 후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1993년 쌍방울을 끝으로 그라운드를 떠났다. 이 감독이 시골팀을 맡아 지도자로 본격적으로 나선 것도 바로 그라운드에서 못다이룬 꿈을 후배 선수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2002년에 야구부를 만든 화순고(교장 김승호)는 이번 봉황기대회에 출전한 55개교 가운데 유일한 군단위 야구팀이다. 전교생이라야 500명 남짓이고, 야구부원도 13명에서 많아야 17, 8명이 고작이다. 대회에도 버스를 빌려 오르내린다. 선수 대다수가 가난한 학생들이다. 2004년 1월9일 화순고에 부임한 이동석 감독이 심혈을 기울여 선수들을 열성껏 가르친 결과 화순고는 2004년 미추홀기 준우승, 2006년 대통령배 4강, 올해 청룡기와 대붕기 16강 등 눈씻고 다시볼만큼 놀랄만한 성과를 일궈냈다. 열악한 환경의 화순고가 이같은 성장을 한 밑바탕에는 이동석 감독 개인의 아픔과 한이 서려있다. 이 감독은 동갑내기 아내(송용금 씨)와 두 딸을 두고 있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중환자이다. 2003년 초에 처가 식구들이 있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솔가해서 건너갔을 무렵 그만 그의 아내가 덜컥 병에 걸려 십이지장 대수술을 했다. 차라리 한국으로 돌아가서 살자고 다시 귀국한 직후 송용금 씨는 유방암에 걸려 다시 수술을 받았고 1년 뒤에는 갑상선암으로 또 수술을 받아야했다. 송 씨는 사선을 넘나드는 대수술을 3차례나 받고도 아직 기적처럼 살아 있다. 남편이 그토록 갈망했던 야구 지도자로서 길을 가고 있는 것에 감사와 격려를 보내면서 그 자신도 힘겨운 투병생활을 4년 남짓 이어가고 있다. 이동석 감독은 귀국 후 속초상고 투수코치를 거쳐 화순고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그가 굳이 고교야구 지도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험했던 프로선수 시절을 돌이켜 봤기 때문이다. 그는 감독 코치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경기에 잘 안내보내준다고 감독 코치에게 대들기도 했다. 자연히 그의 선수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노히트노런의 대기록도 세웠던 촉망받았던 투수였지만 그의 선수생활은 짧았다. 7년간의 선수생활 동안 12승 7세이브 16패의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그는 그라운드를 떠났다. 선수생활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전철을 되밟게 하지 않으려고 그는 엄하지만 합리적인 지도자상을 항상 머리에 그리며 선수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 감독은 “선수들의 심리를 잘 살펴가면서 지도합니다. 윽박지르면 안됩니다. 꾸중을 하더라도 먼저 합당한 이유를 설명해주고 야단을 칩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 감독은 선수가 되바라진 행동을 하거나 어긋나는 행동을 보이면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화순고의 야구환경은 그야말로 열악하기 짝이 없다. 우선 선수수가 적어 한 명이라도 다치면 훈련 자체가 어렵다. 그 흔한 비닐하우스 연습 시설은 물론 없고 비가 오거나 날씨가 궂으면 피할 데도 마땅치 않고 아예 훈련을 접어야 한다. 야간에는 가로등 밑에서 스윙연습과 섀도피칭 훈련을 하기도 한다. 그런 환 경 속에서 노성호와 김선빈(이상 3학년) 같은 청소년 대표도 키워냈고, 대학 진학도 꾸준히 시키고 있다. 화순고 선수들은 평소에는 수업을 듣고 대회가 임박하면 하루 6, 7시간 강행군을 한다. 그래도 선수들이 군말없이 따라주는 것이 그는 고맙다. 이번에도 연일 이어진 비 때문에 사흘간 전혀 훈련을 하지 못하고 2회전에 나섰다가 다 잡았던 고기를 놓쳤다. 비록 봉황기대회에서 화순고는 도중하차했지만, 그들의 야구는 계속된다. 화순고는 올해 전국체전에 전남대표로 뽑혔다. 2004년에 11명이 미추홀기 준우승을 일궈낸 정신력으로 그들은 달릴 참이다. 이 감독은 “아내가 4년째 정기적으로 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으며 의지력으로 버텨내고 있다는 게 눈물겹도록 고맙습니다. 앞으로 미추홀기와 전국체전이 남아 있는데, 계속 도전해 봐야지요”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내의 간병과 두 딸의 양육, 그리고 척박한 시골 학교 야구부의 어려움을 딛고 이동석 화순고 감독은 다시 비상을 꿈꾼다. 이동석 감독은 자신의 노히트노런 야구공을 여태껏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기록 당시 9회 말 2사 후 마지막 타자였던 백인호를 삼진으로 잡고 환호했는데, 유승안 선배(포수. 전 한화 이글스 감독)가 경기 후 그 공을 저에게 건네줬지요. 유일하게 제가 보관하고 있는 야구공입니다”고 그는 눈을 가느스럼하게 뜨며 말했다. 그는 어느새 노히트노런의 마음자세로 돌아가 있었다. chuam@osen.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