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이상학 객원기자] 2할5푼8리. 믿기지 않겠지만 ‘한국산 안타제조기’ 이병규(33·주니치)의 올 시즌 타율이다. 국내에서 10년 이상 뛴 선수 중 역대 통산 타율 3위(0.312)로 최다안타 타이틀만 무려 5차례나 차지한 한국 야구 현역 최고의 교타자 이병규지만 한국 선수들의 일본 프로야구 진출 첫 해 부진 징크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한 단계 높은 무대에 진출하자마자 잘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병규의 성적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 도전 야구는 환경과 적응이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스포츠다. 게다가 이병규는 일본에서 외국인선수,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돈을 받는 대가로 일하는’ 용병이다. 리그에 대한 적응부터 문화에 대한 적응, 밀려오는 외로움, 높은 기대치, 퇴출 불안감 등 타지의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의 시간이 필요한 야구를 한다는 것은 굉장한 도전정신과 인내심을 요한다. 사실 이 때문에 지난해 FA가 됐을 때 이병규가 일본으로 진출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병규는 ‘게으른 천재’ 소리를 들은 선수였다. 4할에 도전할 수 있는 재능을 지닌 타자가 3할에만 만족한다는 평가가 다수였다. 공을 맞히는 재주는 타고났으나 상·하체가 따로 노는 이병규의 기묘한 타격 폼은 흉내낼 수도 없지만, 흉내내서도 안 될 성질의 것이었다. 이병규는 노력형보다는 천재형 선수에 가까웠고 국내에서 마지막 몇 년간은 정체된 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병규는 FA가 되자마자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로 이적을 결심하며 스스로에게 새로운 도전에 대한 자극을 불어넣었다. 우리 나이 34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이병규는 의외의 결정이라 할 수 있는 일본 진출을 결심하며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국내에서는 팀 우승을 빼면 나름대로 이뤄 볼 것을 모두 경험한 이병규에게는 더 높은 무대를 향한 도전 갈증이 마음 속 깊은 계곡에서 메아리로 울렸던 것이다. 겨우내 센트럴리그 투수들의 투구를 비디오를 통해 숙지한 이병규는 일본어 테이프까지 틀어놓으며 리그는 물론이고 문화에 대한 적응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키나와 스프링캠프 때도 이병규의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은 계속됐다. 비교적 순탄했던 그의 야구인생에서 일생일대 도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환경 오치아이 히로미쓰 주니치 감독은 직접 이병규의 영입을 주도하고 결정했다. 지난 3년간 주전으로 활약한 알렉스 오초아가 해를 거듭할수록 하향세를 보이자 결단을 내린 것이다. 알렉스의 자리를 대신한 선수가 바로 이병규였다. 1974년생 이병규는 1972년생 알렉스보다 2살 더 젊었다. 주니치는 올해를 일본시리즈 우승의 적기라 판단하고 2살 더 젊은 이병규를 택했다. 예부터 ‘자매구단’ LG의 이병규를 주목해온 주니치는 전성기 시절 공수주 삼박자를 두루 갖춘 그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이병규는 2003년 무릎 부상 이후 폭발적인 주력을 잃었고 장타력도 매년 감소하고 있었다. 30홈런-31도루를 기록한 1999년의 이병규는 오래된 책장 속 책갈피처럼 과거의 선수였다. 객관적인 데이터를 놓고 볼 때 이병규는 전성기에서 점차 내려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니치는 이병규의 재능을 높이 샀다. 특히 오치아이 감독은 비디오를 보지도 않고 이병규를 데려올 정도로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스프링캠프 때부터 시즌 초반까지 오치아이 감독의 이병규에 대한 신뢰는 계속됐다. 그러나 새로운 환경의 벽에 부딪친 이병규는 곧 난관에 봉착했고, 성적이 급했던 오치아이 감독도 무한 신뢰를 그칠 수 밖에 없었다. 이병규는 전형적인 ‘배드볼 히터’다. 좋게 말하면 적극적인 타격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극단적인 타격이었다. 게다가 이병규는 3구 이내로 승부를 보는 타입이다. 국내에서는 특유의 감각으로 약점들을 커버해냈지만 일본에서는 그동안 자주 접하지 못한 정교한 왼손 투수와 종으로 떨어지는 변화구에 말려들면서 달라진 환경에 대한 고초를 겪기 시작했다. 타율은 둘째 치더라도 출루율(0.294)과 장타율(0.370)이 현격히 낮으며 삼진(81개)이 볼넷(18개)보다 4.5배나 많은 것도 매우 부정적인 대목. 국내에서도 이병규는 볼넷이 많지 않은 타자였지만, 그렇다고 삼진을 많이 당하는 타자도 아니었다. 환경은 사람을 바꿀 수 없을지라도 성적은 바꿀 수 있었던 셈이다. ▲ 적응 이병규는 클린업 트리오의 한 축인 5번 타자로 시즌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6번, 7번으로 타순이 한 단계씩 내려가더니 8번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오치아이 감독은 이병규를 한 차례 2군으로 보낸 후 다시 1번부터 3번까지 다양한 타순에 기용했다. 올 시즌 이병규는 ‘붙박이’ 타이론 우즈가 버티고 있는 4번 타순과 투수들이 주로 배치되는 9번 타순을 제외한 나머지 7개 타순을 모두 돌아다녔다. 국내에서 이병규는 주로 3번 타순에서 가장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후쿠도메 고스케가 팔꿈치 부상으로 시즌-아웃된 이후 6경기에서 3번 타자로 기용된 이병규는 그러나 20타수 5안타, 타율 2할5푼으로 이렇다 할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올 시즌 이병규는 타석당 평균 3.86구 안에서 타격을 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병규의 스타일대로 초구를 건드렸을 때는 타율 4할9리를 기록했고 2구를 타격했을 때는 타율 3할2푼9리를 마크했다는 점이다. 3구 타격시 타율은 2할6푼8리로 시즌 타율을 약간 웃돈다. 3구 이내 타격시 타율은 이병규에게 딱 어울리는 3할2푼1리. 이병규 특유의 적극적인 타격이 일본에서도 어느 정도 통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4구 이후 타격에서 타율은 1할8푼1리로 곤두박질친다. 볼카운트가 불리해질수록 몰리는 경향이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베테랑 타자인 이병규가 볼카운트가 불리하다는 이유만으로 타율이 낮은 것은 난센스다. 일본투수들의 한 차원 높은 위닝샷이 이병규에게는 불리한 볼카운트 그 이상의 짐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병규는 최근 7경기 연속 안타를 생산해내며 조금씩 일본 투수들의 습성과 스트라이크존에 대한 적응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모습이다. 최근 7경기에서 24타수 9안타, 타율 3할7푼5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9안타 중 7안타가 역시 3구 이내에서 이뤄진 타격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병규의 타격 밸런스가 예의 모습을 점차 회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심을 최대한 뒤쪽에 둔 채 안정된 스윙으로 공을 맞히고 있다. 9안타 중 타구가 오른쪽으로 간 안타는 2개밖에 없었다. 물론 올 시즌 이병규의 안타 분포도는 부챗살이라 할 만하나 변화구를 톡톡 갖다 맞히면서 안타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더없이 긍정적이다. 숱한 시행착오에 따른 기술적인 문제점과 스타일적인 문제점에서 어느 정도 접점을 찾아가고 있는 신호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병규와 주니치의 계약기간은 2년이다. 올 시즌은 어차피 이병규에게 적응의 해였다. 이병규가 진짜 승부수를 띄워야 할 시점은 바로 내년이다. 이병규의 환경과 적응의 파노라마가 진정으로 빛을 보며 활짝 펼쳐질 시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야구의 환경을 즐기는 마음으로 적응하는 이병규. 그에게 화려한 파노라마가 펼쳐질 날도 머지않을 것이다.
